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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명·번영의 대가는 ‘불타는 지구’

몽골제국부터 유럽인 항로 개척
산업혁명·‘대가속 시대’ 거치며
전 세계 생태계 연결… 경제 발전
동시에 자연훼손·기후위기 초래
성장 뒤 숨은 희생·그림자 추적

번영의 대가/수닐 암리스/추선영 옮김/이봄/3만2000원

 

“인류 문명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일까, 파괴의 역사일까.” 예일대 역사학과 석좌교수인 수닐 암리스의 ‘번영의 대가’는 지난 800년의 세계사를 ‘혁신’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렌즈로 다시 읽어낸다. 저자는 인간이 지구를 본격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누리는 번영이 어떤 선택과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경제를 성장시켜 온 과정이 생태계와 사회, 그리고 약자들에게 어떤 대가를 남겼는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원제 ‘The Burning Earth’가 암시하듯, 오늘의 풍요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인간의 번영은 자연환경의 훼손과 수많은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졌으며, 기후위기와 생태 위기는 그 결과라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 책은 문명의 성취를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감춰진 비용을 직시하게 만드는 역사서다.

책은 인류 문명의 세 차례 거대한 전환점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첫 번째는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제국은 정복전쟁으로 기억되지만, 저자는 이를 유라시아 생태계를 하나로 연결한 최초의 세계화로 해석한다. 사람과 물자뿐 아니라 작물과 가축, 병원균까지 대륙을 넘나들며 자연환경 자체가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어 15∼17세기 유럽인들이 새 항로를 개척한 ‘대항해시대’는 이런 연결을 바다로 더욱 넓혀 놓았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이른바 ‘콜럼버스 교환’이다. 유럽과 아메리카가 연결되면서 감자와 옥수수, 토마토 같은 작물이 유럽으로 전해졌고, 이는 식량을 크게 늘려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인이 가져온 천연두와 홍역은 면역력이 없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초토화했다. 저자는 한 세기 만에 원주민의 약 90%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1492년부터 1866년까지 약 1250만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로 강제 이송돼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혹독한 노동을 했다. 세계화는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식민지 지배와 노예무역, 환경 파괴라는 어두운 역사도 함께 남겼다는 것이다.

수닐 암리스/추선영 옮김/이봄/3만2000원
수닐 암리스/추선영 옮김/이봄/3만2000원

두 번째 전환점은 산업혁명이다. 석탄과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쓰기 시작하고 증기기관과 철도, 전기, 질소비료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물건을 만들고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됐다.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고 평균수명도 길어졌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발전에도 큰 대가가 따랐다고 지적한다. 공장을 세우기 위해 숲이 사라졌고, 광산 개발로 자연이 훼손됐다. 강은 공장 폐수로 오염됐고, 농업 생산성을 높인 질소비료는 강과 바다의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구체적인 사례도 흥미롭다. 일본은 산업화 과정에서 석탄 생산량이 한 세기 만에 20배나 늘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트바테르스란트 금광에서는 지금까지 인류가 캐낸 금의 약 40%가 생산됐다. 이는 산업혁명이 얼마나 막대한 양의 자원을 짧은 시간 안에 소비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산업혁명 이후 불과 100년 만에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약 30% 증가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기후위기의 뿌리가 이 시기에 시작됐음을 말해준다.

산업혁명은 석탄과 석유, 증기기관, 전기 등의 기술 혁신으로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를 이끌며 인류의 번영을 가져온 반면에 산림 파괴와 환경오염이 뒤따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산업혁명은 석탄과 석유, 증기기관, 전기 등의 기술 혁신으로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 인구 증가를 이끌며 인류의 번영을 가져온 반면에 산림 파괴와 환경오염이 뒤따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세 번째 전환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대다. 전쟁 중 발전한 화학기술과 석유산업, 자동차와 항공산업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경제성장을 이끄는 핵심 산업이 됐다.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자연 훼손도 심해졌다. 아마존과 동남아시아의 열대우림은 농장과 목초지로 바뀌었고,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하면서 지구온난화도 본격화됐다. 저자는 이제 인간은 단순히 자연을 이용하는 존재를 넘어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 자체를 바꾸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경고한다.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환경문제를 단순히 자연보호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혁명도, 세계무역도, 의료 발전도 인류를 더 오래, 더 풍요롭게 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문제는 번영 그 자체가 아니라 번영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저자가 “발전으로 가는 길은 폐허로 포장되어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발전은 필요했지만 그 비용은 미래 세대와 자연, 그리고 식민지와 사회적 약자에게 떠넘겨졌다.

역사의 주인공을 바꾸는 시선도 인상적이다. 유럽 중심의 발전사가 아니라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노동자와 원주민, 식민지 주민들의 삶을 통해 세계사를 다시 구성한다. 브라질 아마존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환경운동가 시쿠 멘지스와 나이지리아 오고니족의 권리를 위해 싸운 켄 사로위 같은 인물들을 조명하며 환경 문제는 곧 사회정의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에콰도르 헌법의 ‘자연의 권리’ 조항과 뉴질랜드의 강에 법인격을 부여한 사례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단순히 기후위기를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역사와 경제, 정치, 생태학을 함께 읽어야 하는 종합 교양서에 가깝다. 가볍게 읽기에는 쉽지 않지만, 그만큼 얻는 통찰은 깊다. 오늘날 기후위기는 인류 문명의 실패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류 문명이 이룬 성공이 남긴 그림자임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