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이래 러시아는 오랫동안 남캅카스(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맹주 역할을 해왔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수년 전까지 이 지역은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간주되었다. 러시아는 독립국가연합(CIS)과 군사동맹체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편으로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자를 자임해 왔다. 예컨대, 아제르바이잔 내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거주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분쟁에서 러시아는 평화유지군 파견 등을 통해 분쟁 중재 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2020년 분쟁 때만 해도 러시아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측을 설득해 휴전 합의를 끌어냈다. 나아가 러시아는 분쟁 지역과 아르메니아를 잇는 ‘라친 회랑’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해 무력 충돌을 억제했다. 그러나 2023년 9월 19일 아제르바이잔 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점령 작전을 펼칠 때 러시아는 사실상 방관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는 자신의 전략적 파트너인 튀르키예가 후원하는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작전에 거리를 둔 것이다. 그 결과 30년을 버텨오던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단 하루 만에 아제르바이잔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오던 10만명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정든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지정학은 권력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사태 이후 러시아를 불신하게 된 아르메니아는 서방 측에 러브콜을 보냈고 미국은 그 틈새를 기민하게 파고들었다. 2025년 8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의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과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3국 정상은 아르메니아 영토인 43㎞ 길이의 ‘잔게주르’ 회랑을 관통하여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역외 영토인 나흐츠반을 연결하는 ‘국제 평화 및 번영의 트럼프 루트(TRIPP)’ 구축을 선언했다. 아르메니아의 주권을 인정하되 미국 기업이 중심이 되어 철도, 도로, 광섬유, 가스관 등을 깔아 복합 교통·물류 회랑으로 개발한다는 것이다.
아르메니아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조지아를 경유하는 기존의 루트 대신 유럽으로 향하는 새로운 교역로 구축에 참여함으로써 기존의 대러 협력뿐 아니라 서방과의 협력 강화를 기대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본토와 나흐츠반을 거쳐 튀르키예까지 연결되는 안정적인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은 물론 이란 북부 국경 인근에 지정학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 추진을 계기로 지난 수십 년간 서로 날카롭게 대립해 온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적대 관계를 청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물류망을 구축해 그들과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려는 튀르키예도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견제 세력도 만만찮다. 러시아는 자신의 영향권이던 남캅카스에 미국이 진출하는 것을 지정학적 위험 요소로 인식한다. 이란은 자신의 국경 지대에 미국의 영향력 구축을 제도화시켜 주는 TRIPP를 안보 위협으로 보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중국도 TRIPP를 통한 미국의 남캅카스 진출이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이란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란의 강경파들은 “TRIPP는 트럼프 용병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트럼프 루트’를 잠재적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미·이란 전쟁의 장기화는 ‘국제남북운송회랑’ 등 이란을 경유하는 물류 통로의 효용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TRIPP의 유용성을 부각했다. 이는 미·이란 전쟁이 남캅카스 지정학 변화의 촉매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러·우 전쟁과 미·이란 전쟁은 남캅카스 지역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두 전쟁은 교전국을 넘어 주변국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살펴본 남캅카스의 사례는 명분이나 이념 또는 과거의 인연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과 번영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이익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사태 이후의 전략적 딜레마를 러시아뿐 아니라 서방까지 포괄하는 전방위 외교로 돌파하려는 아르메니아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장덕준 국민대 명예교수·유라시아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