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⑩다베로 팜스&와이너리>
실리콘밸리 IT 전문가 내던지고 소노마로
40년 걸처 척박한 땅 미생물 사는 토양 만들어
토스카나서 800살 올리브 가지 들여와 심어
사그란티노 등 이탈리아 품종 주로 재배
건강한 포도로 건강하고 품질 뛰어난 와인 생산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힐즈버그, 드라이 크릭 밸리에 자리한 다베로 팜스&와이너리(DaVero Farms & Winery). 정문을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건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양, 닭, 돼지 몇 마리입니다. 나파밸리와 소노마의 와이너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멋진 건물과 완벽하게 정돈된 잔디밭은 이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대신 바이오다이내믹과 유기농 인증을 받은 건강한 포도밭만 있을 뿐입니다. 다베로 팜스가 ‘캘리포니아 친환경 농법의 살아있는 교본’으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IT 전문가에서 자연환경 살리는 농부로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마와 손등에 진한 주름이 졌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한 다베로 팜스 창업자 리즐리 에버즈(Ridgely Evers)가 온화한 얼굴로 인사합니다. 그는 원래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정보기술(IT) 전문가로 와인이나 농업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늘 동경하던 그는 1982년 드라이 크릭 밸리의 유서 깊은 땅 ‘홈 팜(Home Farm)’을 사들였고 회사를 오가며 주말 농장을 가꾸었습니다.
당시 그는 농사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고 땅은 웅장했지만 아주 척박했다고 돌아봅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유기물이 전혀 없는 척박한 땅이었어요.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토양으로 회복됐어요. 얼마 전 땅을 파봤더니 표토 두께가 16인치(약 40cm)나 되더군요. 지렁이 무게만 샘플링해서 계산하면 에이커당 약 0.5t에 달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일이라곤 자연이 스스로 움직이게 놓아둔 것뿐입니다. 커버크롭을 심고 퇴비를 줬을 뿐이죠.”
그는 최근 미국 조류 보호 단체인 내셔널 오듀본 소사이어티(National Audubon Society)가 다베로 팜스에 직접 와서 조류 조사를 했는데, 노던 소노마 카운티에서 종 다양성과 개체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걸 의도한 건 아니에요. 새집이나 새 모이통 같은 걸 설치하지 않았죠. 그냥 자연이 스스로 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답니다.”
에버즈가 아무 일도 안 했다고 말하지만 이처럼 땅을 되살린 것은 2003년쯤부터 시작한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덕분입니다. 그는 2008년부터 포도밭도 바이오다이내믹으로 가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서 빌린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땅을 받았을 때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답니다.”
◆토스카나에서 건너온 800살 올리브나무
이탈리아를 오가다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에버즈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소노마가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은 온화한 토스카나의 지중해성 기후와 닮았다는 점입니다. 이에 1988년 그는 토스카나에서 800년 된 올리브 나무에서 꺾꽂이 가지를 가져와 1990년 농장에 심었습니다. 1800년대 이후 미국으로 정식 수입된 최초의 올리브나무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어느 쪽 끝을 아래로 심어야 하는지도 확신이 없었는데, 다행히 나무들은 여기를 좋아했고 잘 자라줬습니다.”
이 나무에서 짜낸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은 1990년대 중반 국제적 명성을 얻습니다. 재미난 일화가 있습니다. 에버즈의 아내 콜린 맥글린(Colleen McGlynn)은 샌프란시스코의 전설적인 레스토랑 ‘스타스(Stars)’에서 셰프로 일했던 인물로, 자신이 만든 올리브 오일을 요리에 사용했습니다. 맥글린과 셰프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마리오 바탈리(Mario Batali) 셰프는 평소 다베로 팜스의 올리브 오일을 극찬합니다. 그는 뉴욕에 레스토랑 ‘밥보(Babbo)’를 열면서 다베로 오일을 하우스 오일로 쓰기 시작합니다. 또 1999년 1월 이탈리아의 유력 미식 가이드 감베로 로쏘(Gambero Rosso)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이 오일이 캘리포니아산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출품했는데 ‘톱 토스카나 올리브 오일 셀렉션’에 선정됩니다. 당시 바탈리는 “서부 토스카나에서 가져온 오일이랍니다. 정말 서쪽에 있는 곳이죠. 바로 캘리포니아랍니다.”라고 공개해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뉴욕의 밥보에서 만난 운명의 와인
1999년 5월, 소프트웨어 업계 일로 지친 나날을 보내던 에버즈는 뉴욕 출장길에 바탈리 셰프와 저녁 자리를 가집니다. 장작불에 구운 양고기 앞에서 바탈리가 씩 웃으며 따라준 와인 한 모금에, 그는 인생의 방향을 다시 정했습니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을 마시고는 물었습니다. 같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고 싶어. 이게 뭐야?”
그 와인은 이탈리아 움브리아(Umbria) 지역의 거장, 파올로 베아(Paolo Bea)가 생산하는 몬테팔코 사그란티노(Montefalco Sagrantino)였습니다. 사그란티노 품종이 소노마의 기후에 완벽히 맞을 거라 확신한 그는 2000년 첫 포도밭 호크 마운틴 빈야드(Hawk Mountain Vineyard)에 산지오베제와 사그란티노를 심었고 2004년부터 본격적인 상업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와인은 산지오베제 로제였습니다.
2008년 부부는 화학 농법으로 오랫동안 방치돼 황폐해진 인근 부지 ‘발라다레스 빈야드(Valladares Vineyard)’를 추가로 매입했습니다. 이 죽은 땅을 되살리기 위해 그해부터 전면적인 유기농·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도입했고, 지금은 데메터(Demeter) 인증과 캘리포니아유기농인증농가협회(CCOF) 인증을 모두 받은 ‘살아있는 농장’으로 운영됩니다.
◆다베로와 아비보
다베로 팜스는 다베로와 아비보(Avivo) 두 개의 라인으로 와인을 선보입니다. 다베로는 자체 에스테이트 빈야드 호크 마운틴 빈야드(Hawk Mountain Vineyard) 등에서 엄격하게 관리·재배한 포도만 사용해 만듭니다. 바르베라(Barbera), 돌체토(Dolcetto), 프리미티보(Primitivo)와 탄닌이 강하고 장기 숙성에 적합한 희귀 품종 사그란티노(Sagrantino)를 주로 사용하고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시간을 들여 숙성시키는 스타일로 만듭니다.
아비보는 에버스가 다베로의 친환경 철학을 더 넓은 대중적 식탁으로 확장하기 위해 추가로 설립한 자매 브랜드입니다. 다베로가 자가 소유 포도밭에 머무는 것과 달리, 아비보는 캘리포니아 로다이(Lodi) 지역의 레드베터 패밀리 빈야드(Ledbetter Family Vineyards) 등 외부의 인증된 유기농·재생 농업 파트너 농가로부터 포도를 공급받아 와인을 완성합니다. 아비보는 산지오베제 중심의 레드 블렌드, 베르멘티노 품종의 화이트 와인, 그리고 산지오베제 베이스의 로제 와인을 생산하며, 오크 숙성을 과도하게 두지 않고 바로 마시기 좋은 신선하고 활기찬 푸드 매칭 스타일을 추구합니다.
친환경 접근 방식에도 아비보만의 색깔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에서 몇 안 되는 글리포세이트 프리(Glyphosate-Free, 제초제 라운드업 미검출) 인증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이며,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경량 병을 채택하고 해양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코르크를 사용하는 등 패키징에서도 차별화를 두고 있습니다.
◆건강한 음식과 와인
다베로 팜스에서는 셰프인 맥글린이 직접 만드는 미식을 와인과 페어링할 수 있습니다.
▶다베로 프리잔테(DaVero Frizzante)
식사에 앞서 잔을 채운 것은 다베로 프리잔테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빈티지에 따라 품종이 달라집니다. 주로 모스카토를 베이스로 산지오베제나 바르베라를 블렌딩합니다. 살짝 남은 단맛이 산도와 섬세한 버블과 균형을 이룹니다. 복숭아, 살구, 오렌지 블로섬 같은 화사한 아로마로 시작해 붉은 베리와 스파이스 뉘앙스가 올라옵니다.
로다이(Lodi) 리버스 엣지 빈야드(River's Edge Vineyard)에서 자라는 베르멘티노 100%로 만듭니다. 송이째 압착해 스테인리스 탱크와 뉴트럴 오크에서 자연 효모로 발효하고 말로락틱 발효는 하지 않아 생기발랄한 산도가 돋보입니다. 레몬 버베나, 화이트 피치, 핑크 자몽, 보스크 배, 화이트 플라워가 어우러지고 솔티한 미네랄도 느껴집니다.
다베로 팜스를 유명하게 만든 마이어 레몬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콜리플라워 수프와 함께합니다. 레몬 올리브 오일이 베르멘티노 특유의 자몽·레몬 계열 산미와 같은 결의 향을 주고받습니다. 특히 말로락틱을 거치지 않아 살아 있는 산도가 콜리플라워의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을 가볍게 씻어 맛의 밸런스를 맞춰 줍니다.
마이어 레몬 올리브오일을 만드는 올리브는 3분의 1가량을 나무에 남겨둔 채 마이어 레몬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수확해 만듭니다. 레몬즙은 따로 짜내 인근 베이커리에 판매하고, 남은 레몬 껍질은 올리브와 함께 압착기에 넣습니다. 올리브 세포 속 기름방울을 분리하는 압착 과정에서 레몬 껍질 조직의 기름방울까지 함께 끌어내는 방식으로 만듭니다.
▶다베로 로제와 와일드 머시룸 리조토
100% 유기농 산지오베제로 만듭니다. 오렌지 제스트, 카다멈 향으로 시작해 살구, 복숭아, 블러드 오렌지, 패션프루트, 화이트 체리, 딸기, 라즈베리 풍미가 느껴집니다. 산지오베제 기반이라 산미와 은은한 타닌 구조를 함께 갖추고 있어 리조토의 크리미함을 가볍게 정리해주면서도 버섯의 깊은 풍미를 짓누르지 않아 풍미를 잘 살려줍니다.
다베로의 첫 와인이자 지금도 이 농장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와인입니다. 2000년 호크 마운틴 빈야드에 처음 심은 산지오베제로 2004년부터 선보였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 “맛있는 것이 와인의 첫 번째 의무”라는 에버스의 철학이 잘 담겨있습니다. 철학이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담긴 잔입니다.
▶아비보 레드와 오리다리 콩피
로다이의 레드베터 패밀리(Ledbetter Family) 빈야드에서 자라는 산지오베제가 주품종이며 시라를 5% 정도 블렌딩합니다. 크랜베리, 루바브, 딸기 퓌레, 월계수, 구운 레몬 제스트와 흙내가 층을 이룹니다. 렌틸, 쐐기풀을 곁들인 오리 다리 콩피와 페어링합니다. 산지오베제의 높은 산도와 시라가 선사하는 스파이스한 노트가 오리 다리 콩피의 기름진 질감을 정리해주고, 베이리프·흙내 같은 와인의 향미가 렌틸·쐐기풀의 채소성·흙내와 자연스럽게 맞물립니다.
▶다베로 레이트 하베스트 모스카토와 시트러스 아몬드 케이크
늦수확한 모스카토 100%입니다. 바이오다이내믹 인증 포도를 자연효모로 발효하며 잔당이 9.5%로 일반적인 레이트 하베스트 디저트 와인보다는 당도가 낮아 잘 절제된 단맛을 선사합니다. 모스카토 특유의 꽃향·핵과류 단맛이 시트러스 아몬드 케이크의 아몬드 향과 자연스럽게 맞물리고, 상대적으로 절제된 잔당 덕분에 캐러멜 소스의 단맛과 부딪힘 없이 균형을 이룹니다. 레이트 하베스트 특유의 산미가 케이크의 무게감을 가볍게 씻어내는 역할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