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나면 원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부모가 미국 시민인지, 영주권자인지, 불법체류자인지는 원칙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1868년 제정된 수정헌법 14조에 뿌리를 둔 미국의 이른바 ‘출생시민권’제도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원칙을 다시 흔들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출생시민권 적용 범위를 제한하고 이른바 ‘원정출산’을 단속하는 내용의 행정조치에 서명했다. 일부 외국인의 미국 출생 자녀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도록 하면서, 출산을 목적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과 이를 알선하는 업체 등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 국무부와 국토안보부에는 원정출산 목적의 입국을 차단하고 과거 관련 행위에 가담한 외국인이나 단체 등에 대해서도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지난 6월 연방대법원의 출생시민권 판결을 거론하며 “아주 부당한 결정이었다”며 “그래서 우리는 제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서 막힌 지 5주 만에…다시 출생시민권 건드린 트럼프
이번 조치가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5주 전 대법원에서 출생시민권 제한 문제로 제동이 걸렸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재집권 직후 불법체류자나 관광·학생·취업비자 등 임시 체류 자격을 가진 외국인의 미국 출생 자녀에게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30일 6대3 의견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한 다수 대법관은 수정헌법 14조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관할권 아래 있는 사람에게 폭넓게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보수 성향의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헌법 문제와 별개로 현행 연방법이 출생시민권을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행정명령만으로 이를 바꾸기 어렵다는 취지의 의견을 냈다.
◆대법원은 왜 막았나…노예제 폐지에서 시작된 158년 원칙
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출생시민권 제한에 제동을 건 배경에는 150년 넘게 이어져 온 헌법과 판례가 있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68년 수정헌법 14조를 통해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귀화하고 미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미국 시민으로 규정했다. 해방된 흑인과 그 자녀의 시민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려는 취지였다.
이 원칙은 이후 이민자의 자녀에게도 적용됐다. 연방대법원은 1898년 ‘미국 대 웡 킴 아크’ 판결에서 중국인 부모 사이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도 시민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부모의 국적이나 이민 자격과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시민권을 별개로 본 것이다. 이 판례는 이후 100년 넘게 미국 출생시민권의 핵심 법적 근거가 됐다.
◆대법원 정면돌파 대신 기존 예외 넓히기
대법원이 제동을 받았던 지난해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이 불법체류자와 임시비자 소지자의 자녀를 광범위하게 겨냥했다면, 이번에는 대상을 좁혔다. 외국 정부를 위해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일부 인사의 자녀, 이른바 ‘적성 외국인’이나 테러단체 관련자의 자녀, 출산과 시민권 취득을 목적으로 미국 입국 과정에서 사기 행위를 한 외국인의 자녀 등이 ‘출생시민권 제한’ 대상에 포함됐다.
미국의 출생시민권에는 원래부터 예외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외국 외교관의 자녀다. 외교관은 미국의 통상적인 사법 관할권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전쟁 중 미국을 점령한 적군의 자녀 역시 전통적으로 예외 사례로 거론돼 왔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기존 예외의 범위를 더 넓은 외국 정부 관계자나 적성국·테러단체 관련자로 확대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출생시민권의 원칙 자체를 다시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기존 판례와 법률이 인정하는 ‘예외’의 경계를 넓히는 전략인 셈이다.
◆이번에는 ‘이민 신분’ 대신 ‘사기’ 논리
이번 조치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원정출산을 ‘사기’ 문제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광이나 학업 등을 목적으로 비이민 비자를 받은 외국인이 실제로는 자녀의 미국 시민권 취득을 목적으로 입국했다면 이는 제도의 악용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이 논리는 기존의 출생시민권 논쟁과는 결이 다르다. 과거에는 부모가 불법체류자거나 임시비자 소지자라는 이유로 자녀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을 수 있느냐가 쟁점이었다. 이번에는 부모가 미국 입국 과정에서 허위 진술이나 사기 행위를 했다면 그 결과 태어난 자녀의 시민권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이동했다.
앞으로 법정 다툼에서도 이 부분이 핵심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법원이 지금까지 부모의 불법 행위와 미국에서 태어난 자녀의 시민권을 별개 문제로 다뤄왔기 때문이다. 부모가 비자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자녀의 헌법상 지위까지 달라질 수 있는지가 새로운 법적 쟁점으로 떠오른 셈이다.
미 매체 악시오스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또다시 원정출산에 따른 시민권 획득에 빗장을 걸면서 무효 소송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왜 지금 다시 꺼냈나…11월 중간선거 포석?
미국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출생시민권 제한과 불법이민 단속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 과정에서 반복해서 강조해온 대표적인 이민정책이다. 특히 이민 문제는 공화당 지지층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은 분야로 꼽힌다. 따라서 대법원 판결로 기존 출생시민권 제한 조치가 제동이 걸린 상황에서 원정출산과 비자사기를 앞세운 새 조치를 내놓은 것은 정책적 재도전과 함께 지지층에 이민정책 추진 의지를 보여주는 효과도 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