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영화에서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은 제작부터 배급까지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다. 지원 없이는 영화를 만들기 어렵기에, 심사위원들이 고루 이해하고 지지할 만한 시나리오로 ‘입맛’을 맞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창작자의 고유한 감각보다 소위 ‘개연성 있는 스토리텔링’을 앞세운 무난한 영화가 나오기 십상이다. 상업영화보다 예산이 적을 뿐, 똑같은 작법으로 기획되고 만들어진 밋밋한 독립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
지난 5일 개봉한 최승우 감독의 첫 장편 ‘지난 여름’은 이 문법에서 완전히 비켜나 있는 주목할 만한 영화다. 강원 홍천 논밭에 가뭄이 들고 농민들은 비를 기다린다. 영화는 농촌 풍경과 실제 주민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는 한편, 지역 주민센터 공무원을 그만둔 청년 민우(김민혁) 가족 이야기를 픽션으로 펼쳐놓는다. 실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허구, 전문 배우와 지역 주민들의 연기가 한 영화 안에 공존한다.
현란한 카메라워크는 없다. 음악도 없다. 누군가 죽어도 소란을 떨지 않는다. 이야기는 또렷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계절처럼 흘러간다. 철저하게 최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무엇을 영화에 담아야 하는가’를 구현한 결과다. 반골 기질이라 해야 할까, 무소의 뿔처럼 가는 사람이라 해야 할까. 최 감독을 7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에서 만났다.
“정말 멋대로 만든 영화라 사실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만든 첫 장편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와 이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평론가상을 거머쥐며 주목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정식 개봉으로 이어졌다.
◆밥 한 공기에서 시작된 영화
영화 속 시간은 2022년 모내기부터 추수철까지, 가뭄·장마·추수 세 장(章)으로 나뉜다. 영화의 출발은 밥 한 공기였다. 2021년 가을 어느 숙취가 심한 날 아침,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쌀농사 짓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최 감독의 나이 서른이었다.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몇 편의 단편을 만들었지만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느끼던 때였다.
“문득 밥 먹으면서 제가 너무 한심한 겁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삶이 진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없으면 우리는 밥도 못 먹는데, 난 아무 생각도 없이 맨날 밥 먹고 술 먹고….”
외가가 있던 홍천으로 무작정 갔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해 모내기부터 찍기로 마음 먹었다. 농촌의 계절을 따라가며, 고민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와 생사의 순환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최 감독은 2022년 여름 홍천에서 실제로 살아간 사람들의 시간을 담되, ‘죽음’을 다루기 위해 극영화 형식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계절의 변화, 작물의 생육, 사람과 가축의 탄생과 죽음까지 영화에 생사의 순환을 담았다.
◆주민들의 ‘진짜 말’을 기다리다
그는 수시로 서울에서 홍천으로 가 주민들과 얼굴을 익히고, 여러 주민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들였다. 카메라 앞에 서면 로봇처럼 얼어버리는 주민들에게 자연스러운 말을 끌어내기 위해 최 감독은 독특한 방법을 택했다. 슬레이트를 치지 않고, 스태프들 간 신호는 말 대신 눈짓으로 주고받았다. 카메라가 돌고 있는 상태에서 프레임 속 주민들 곁으로 직접 들어갔다. 영화에 필요한 질문 대신 일상 이야기를 워밍업 삼아 나누다가 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하면 천천히 프레임 밖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말을 기다리며 농민들의 삶을 포착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 중 하나인 “농사는 사람이 20% 짓고, 하늘이 80%를 짓는 것”이라는 말도 그렇게 나왔다. 최 감독이 만들어낸 대사가 아니다. 그는 “그런 말을 만들어낼 만한 경험도 없고, 서울 사람인 내가 ‘농사는 어떠한 것’ 이라 넘겨짚을 자격도 없다”며 “다만 그 말이 나온 순간 카메라 뒤 스태프들 모두 눈을 맞추며 ‘이거다!’ 하고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영화는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농민들의 ‘진인사대천명’의 마음에 다가섰다.
◆“영화가 영화여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는 영화학교를 비롯한 어떤 기관에서도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카메라를 사기 위해 비교적 시급이 높은 조선소에서 일했고, 그렇게 마련한 카메라로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며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갔다.
마음 속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시네아스트로는 포르투갈 감독 페드로 코스타(1958∼)를 꼽았다. 초기작 세 편(‘피’, ‘용암의 집’, ‘뼈’)에서 코스타가 픽션과 다큐멘터리 배합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며 “변화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작사 이름을 ‘파편화’로 지은 것도 코스타의 영향이다. 최 감독에게 영화란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시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연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기승전결이 중요하다면 굳이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어도 된다”며 “영화가 영화여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겨울날들’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고, 올겨울 개봉 예정이다. 최 감독의 오랜 친구 김민혁이 이번에도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무대는 서울로 바뀌었다. 최 감독은 “‘지난 여름’을 찍으며 홍천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워서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것이 모든 일에 적용되지는 않더라”며 “홍천도 진짜이지만, 또 다른 진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지난 여름’과 ‘겨울날들’을 ‘정(正)’과 ‘반(反)’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이어 “내년 가을 크랭크인을 목표로 준비 중인 세 번째 영화로 ‘합(合)’을 만들려 한다”고 덧붙였다.
사비로 ‘지난 여름’을 만들었고, 이 영화로 받은 상금으로 ‘겨울날들’을 만들었다. 영화와 돈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두 영화에 함께한 촬영·조명 감독과 세 번째 영화도 같이하고 싶지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자신이 “아주 잘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를 물었다. “평생 영화를 할 수 있다면 그게 성공입니다. 지금 생각은 그렇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