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은 비철금속 제련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기술과 원료, 대규모 설비 운영 경험 모두 부족했다. 그곳에서 출발한 고려아연은 52년 뒤 아연과 연뿐 아니라 금·은·동, 희소금속까지 함께 회수하는 세계적인 ‘멀티메탈 통합제련’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었다. 창업과 경영, 기술, 원료 경쟁력이 세대를 거치며 차곡차곡 쌓였고 최근에는 핵심광물과 자원순환, 미국 공급망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고려아연의 첫 도전은 최기호 창업주로부터 시작됐다. 1970년대 국내 비철금속 산업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제련사업에 뛰어들었다.
최창걸 회장은 창업주와 함께 회사를 세우고 조직과 재무 기반을 구축하며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최창영·최창근 명예회장은 각각 기술과 자원 분야에서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최창영 명예회장은 1976년 경영에 참여한 뒤 제련 공정 고도화와 유가금속 회수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제련 잔재를 다시 처리해 금속을 회수하는 TSL 기술 개발·상용화도 대표적인 성과다.
최창근 명예회장은 해외 광산과 자원개발 현장을 직접 누비며 안정적인 원료 공급망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경영과 기술, 원료 경쟁력이 맞물리면서 고려아연은 아연과 연을 넘어 금·은·동과 희소금속까지 함께 생산하는 통합제련 체계를 구축했다. 현재의 멀티메탈 경쟁력은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기술과 투자의 결과인 셈이다.
이 같은 성장 방식은 다른 장수 소재기업에서도 나타난다.
LS MnM은 장항·온산제련소를 기반으로 성장한 국내 대표 동제련 기업이다. 2022년 LS-Nikko동제련에서 LS MnM으로 사명을 바꾸고 금속을 뜻하는 ‘Metal’과 소재를 뜻하는 ‘Material’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존 구리·귀금속 제련 경쟁력을 토대로 이차전지 소재 등 미래 소재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벨기에 유미코어 역시 광업과 제련에서 출발했지만 사업구조를 재편해 귀금속 재활용과 자동차 촉매, 배터리 소재 기업으로 변신했다.
공통점은 기존 사업을 버린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쌓은 제련·소재 기술을 새로운 산업에 연결했다는 데 있다.
고려아연의 핵심광물·자원순환 전략 역시 같은 연장선에 놓여 있다. 최윤범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은 선대가 구축한 통합제련 기술을 토대로 핵심광물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갈륨·게르마늄·인듐·안티모니 등 전략금속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제련 경쟁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은 동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갈륨과 게르마늄 생산을 본격화하는 한편, 기존 원료에서 회수할 수 있는 핵심광물 종류와 회수율을 높이는 데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신사업 확장도 병행하고 있다. 최 회장은 2022년 미래 성장전략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제시하고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 ▲이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순환을 3대 성장축으로 육성해 왔다.
호주 신재생에너지 사업, 황산니켈·전구체 등 이차전지 소재, 미국 전자폐기물·스크랩 사업을 기존 제련업과 연결하는 구조다.
멀티메탈 구조의 장점은 실적에서도 드러난다. 특정 금속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금속의 가격 상승이나 판매량 증가, 회수율 개선으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고려아연이 장기간 흑자를 이어온 배경에도 아연과 연, 금·은, 동과 희소금속을 함께 생산하는 사업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다.
단일 제품에 의존하는 제련소와 달리 한 원료에서 최대한 많은 금속을 회수하는 구조 자체가 수익성 방어막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고려아연의 다음 승부처는 미국이다. 회사는 미국 테네시주에 대규모 통합제련소를 짓는 ‘프로젝트 크루서블’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통합제련소에서는 아연과 연, 동뿐 아니라 갈륨·게르마늄·인듐·안티모니 등 다수 핵심광물을 생산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미국이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동맹국 중심의 핵심광물 공급망 구축에 나선 상황에서 고려아연의 통합제련 기술이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52년 전 고려아연의 경쟁력이 광석에서 아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뽑아내느냐에 있었다면 이제 경쟁 기준은 달라졌다.
광석과 스크랩, 산업 부산물에서 남들이 버리는 금속까지 얼마나 많이 회수해 다시 산업에 공급하느냐가 관건이다.
최기호 창업주의 도전에서 시작해 최창걸 회장의 경영, 최창영·최창근 명예회장의 기술·자원 경쟁력을 거쳐 최윤범 회장의 핵심광물·미래사업 전략까지.
과거의 경쟁력을 버리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성장축을 더해온 ‘비전과 도전정신’이 고려아연의 52년을 관통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