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 필리핀 마닐라의 불 꺼진 거실마다 텔레비전만 파랗게 깨어 있었다.
지구 반대편 코트에서 공이 오갈 때마다, 잠 대신 중계를 택한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테니스라고는 잘 몰랐던 나라였다. 농구 골대는 동네마다 있었지만 테니스 코트는 부유한 클럽 담장 안에나 있었고 세계 랭킹에서 필리핀 선수 이름을 찾는 일은 오랫동안 헛수고였다.
그런 나라가 테니스 대회를 보겠다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지난해 봄이었다. 중계 화면 속 선수의 나이는 열아홉. 세계 140위로 마이애미 오픈에 나선 그는 8강에서 만난 세계 2위 이가 시비옹테크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필리핀 선수가 세계 4강에 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알렉산드라 이알라. 필리핀이 반세기 넘게 기다린 이름이다.
네 살 손녀와 단 하나의 하드코트
이알라에게 처음 라켓을 쥐여준 건 테니스광인 외할아버지 로베르토 마니에고였다. 네 살짜리 손녀를 데리고 그가 향한 곳은 발레베르데 클럽의 단 하나뿐인 하드코트였다. 필리핀엔 흔한 값싼 셸코트를 두고 굳이 하드코트를 고집한 건, 손녀가 언젠가 세계 무대에서 뛰게 될 날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이알라는 세 살 터울 오빠 미코와 함께 매일 방과 후 그 코트에서 공을 쳤다.
그리고 2018년, 열두 살의 이알라는 레 프티 아스에서 우승했다. 나달과 알카라스가 어린 시절 거쳐 간 세계 유소년 테니스의 등용문이다. 그 대회를 지켜보던 라파엘 나달 아카데미가 손을 내밀었다.
마닐라를 떠나 나달의 학교로
이듬해, 열세 살의 이알라는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마닐라를 떠나 스페인으로. 낯선 나라, 낯선 언어, 세계 최고의 또래들과 매일 부딪히는 훈련.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버거웠지만, 그는 필리핀 선수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첫 결실을 맺은 건 2022년이었다. 이알라는 US오픈 주니어 여자단식 정상에 올랐다. 필리핀 테니스 역사상 첫 주니어 그랜드슬램 단식 우승이었다.
하지만 주니어 챔피언이라는 이름표는 프로 코트에선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자란 저에게...”
프로의 벽은 높았다. 주니어 US오픈 정상에 섰지만, 성인 무대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름을 세계에 알린 무대가 지난해 마이애미 오픈이었다. 4대 메이저 바로 아래 등급인 WTA 1000 대회. 세계 140위 이알라는 와일드카드를 받아 출전했다.
그리고 거침없었다. 그랜드슬램 챔피언 옐레나 오스타펜코와 매디슨 키스를 차례로 꺾더니, 8강에서는 세계 2위 시비옹테크마저 넘어섰다. 더 이상 ‘필리핀의 유망주’라고만 부를 수 없는 순간이었다.
올여름, 두 사람은 더 큰 무대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윔블던 센터코트였다.
한 시간 반 가까이 이어진 첫 세트에서 시비옹테크가 먼저 세트포인트를 잡았지만, 이알라는 이를 막아내고 타이브레이크 끝에 세트를 가져왔다. 기세를 탄 이알라는 두 번째 세트까지 잡아냈다. 필리핀 선수 최초의 윔블던 16강이었다.
승리 직후 이알라는 벅찬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세레나나 비너스 윌리엄스, 그리고 시비옹테크 같은 선수들에게 이 성과는 작아 보일 수 있겠지만, 필리핀에서 자란 저에게는….”
말끝이 흐려졌다. 이야기는 방과 후면 오빠와 할아버지를 따라 코트로 향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 아이에게 이 승리는 전부예요.”
이알라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복싱의 나라에 등장한 테니스 영웅
필리핀에는 이미 세계를 제패한 스포츠 영웅들이 있었다. 복싱의 매니 파퀴아오를 비롯해 당구와 역도, 체조에서도 정상급 선수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 계보에 테니스 선수는 없었다.
그 빈자리를 이알라가 채웠다. 그가 세계 강호들을 꺾을 때마다 아이들은 라켓을 들었고, 그의 이름이 적힌 옷을 입었다. 나이키는 필리핀 국화 삼파기타를 새긴 이알라 전용 컬렉션까지 내놨다.
이알라가 바꾼 건 우승과 순위만이 아니었다. 필리핀 아이들에게 세계 무대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반세기를 기다린 이름
이알라의 질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일 워싱턴에서 생애 첫 WTA 투어 정상에 섰고 세계 랭킹은 20위까지 올라갔다.
곧 다시 새벽이 올 것이다. 마닐라의 불 꺼진 거실마다 텔레비전이 파랗게 켜지고 사람들은 잠 대신 이알라의 경기를 택할 것이다.
반세기를 기다린 필리핀 테니스의 새벽은 이제 막 밝아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