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공재정 부정수급을 두고 ‘패가망신’을 언급하면서 강경대응을 선포한 가운데 부정수급 업체들이 공공기관을 갈아타며 입찰에 나선 사실이 드러났다. 부정수급으로 적발돼도 환수액만 물고 다른 공공기관에서 입찰을 계속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현행법상 공공기관에서 발생한 부정수급 정보는 정부 부처나 다른 기관에 공유되지 않고 있어 이를 막을 장치조차 없다.
12일 세계일보가 57개 준정부 공공기관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최근 5년간 부정수급 업체 명단을 분석한 결과 부정수급 제재를 받고도 다른 공공기관 사업에 참여한 업체는 9곳에 달한다. 한 공공기관에서 부정수급으로 입찰 제재를 받은 업체는 500개가 넘는 다른 공공기관 입찰에 참여한 사례도 있다. 다른 업체는 입찰 제한을 받고도 수십건의 사업을 따내는 등 별다른 제재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도 확인됐다. 57개 공공기관 중 51개 기관은 부정수급 제재를 받은 업체가 없거나, 명단을 따로 관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더 많은 업체가 제재를 받은 뒤에도 입찰에 참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 산학협력단은 2024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해외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됐다. 이 대학은 이라크, 우즈베키스탄, 코트디부아르, 에콰도르, 나이지리아, 피지 소속 공무원들을 한국에 초청해 우리 정부의 역량을 전파하는 프로그램 6개를 맡았다. 이듬해 코이카의 사후 모니터링 과정에서 이 대학이 6개 사업에서 모두 보조 인력을 실제 투입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됐다. 보조금을 뻥튀기해 사업비를 챙긴 것이다. 코이카는 이 대학에 지급된 사업비 9억원 중 5600만원을 환수하고 용역참여제한 조치 2년을 부과했다.
하지만 이 대학은 지난해 12월부터 용역참여제한 조치가 부과된 이후 다른 정부기관의 공공재정 사업에 77회 입찰했다. 이 중 45개 사업에 낙찰됐다. 부정수급이 적발됐지만 사실상 실효성 있는 제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코이카 관계자는 “공공기관 용역참여제한 조치는 해당 기관의 입찰만 제한하고 있다”며 “다른 기관 입찰까지 제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일반용역 업체 A사는 2022년 소상공인진흥공단의 소상공인유통물류지원 사업에서 미수행 과업이 적발돼 용역참여제한 3년 처분을 받았다. 이 업체는 공공기관의 교육 사업이나 연구 용역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행사 대행업체로, 지역에 있는 물류센터와 협업해 동네 특화형 슈퍼마켓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겠다며 공단 사업을 따냈다. 하지만 실제 공급하지 않은 업체를 적어 사업비를 받아내는 등 부정수급 사실이 사업결과물 점검 과정에서 나타났다.
공단은 사업비 7억원 중 허위로 지원된 1600만원을 환수 조치하고 입찰 제한을 걸었다. 하지만 A사 역시 공단의 용역참여제한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공공기관의 사업 입찰을 이어갔다. 제재가 이뤄진 2023년부터 43건의 공공기관 입찰경쟁에 참여했고 이 중 5건을 따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의 사무용 의자 개발 사업에 참여한 B사도 마찬가지다.
이 기업은 2022년 사업비를 부정사용한 사실이 걸려 총 사업비 1억4300만원 중 9294만원을 환수당했다. 사업비 과반이 부정사용됐다고 판단된 것으로 사실상 사업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이다. 이 업체는 공단으로부터 사업 참여제한 5년 조치를 받았지만 다른 13곳의 공공기관 입찰에 참여해 11곳의 사업을 따냈다.
공단의 음압 격리 모듈 개발 사업에 참여한 강원도의 한 제조업체는 2021년 사업비 부정수급 사실이 적발돼 총 사업비 1억554만원 중 2206만원이 환수됐다. 이 업체도 용역참여제한 4년 조치를 받았으나 2022년부터 참여한 공공기관 입찰 수만 502개에 달했다. 이 중 12개 사업에 낙찰됐다.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의 ‘경영정보통합시스템 및 기반구축’ 사업에 용역으로 참여한 C사도 2022년 사업기간 등 계약이행을 제대로 하지 않아 용역참여제한 1년5개월 조치를 받았다. 그럼에도 C사는 2023년 다른 공공기관에서 2건의 입찰을 따내 사업을 진행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311개 공공기관에서 사업비 환수가 결정된 부정수급은 14만1781건으로 이 중 1796억원이 환수돼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이처럼 정부 사업의 관리·감독이 허술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지만 공공기관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인 입찰 제한은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당 공공기관에 입찰 제한을 당해도 다른 공공기관 입찰에는 페널티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조금법에 따르면 중앙관서의 장(장관)이 부정수급 적발 업체에 대해 보조금, 간접보조금 수급을 제한한 경우 기획예산처와 다른 중앙관서에 통보해 모든 정부 사업의 입찰을 제한할 수 있다. 하지만 준정부 공공기관 사업의 경우에는 부정수급으로 제한 조치가 이뤄져도 중앙부처 국고보조금을 사용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재 대상이 아니다. 부정수급 공공재정의 환수를 강화하는 공공재정환수법도 있지만 이 역시 정부 예산이 직접 지급된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준정부 공공기관이 계약을 통해 이뤄진 사업에서 부정이 발생했다면 동등한 관계의 계약이라 보고 기관 차원에서 처분이 이뤄진다”며 “공공기관 사업이지만 공공재정 환수에 적용되려면 사업 자금이 정부 부처의 보조금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준정부 공공기관 사업들은 사실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전문가 지적이 이어진다.
최호택 배재대 교수(행정학)는 “공공기관도 정부의 세금이 투입되지만 정부 규제에 준하는 강력한 규제가 이뤄지지 않아 감시가 소홀하다”며 “공공기관 수가 많아 현재처럼 한 기관에서만 받는 입찰 제한 조치는 거의 의미가 없고 다른 곳에서 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공동 연대 제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회에서도 이 같은 부정수급 제재 허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국민의힘 김태호 의원 등 12명은 공공기관이 현장에서 보조사업을 실질적으로 관리·감독하며 위반행위를 인지하는 경우 처분 권한을 가진 중앙관서의 장에게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보조금법 개정안을 지난 5월19일 발의했다. 김 의원은 “공공기관이 부정수급업체를 적발하고도 중앙관서에 즉시 통보하지 않아 입찰제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태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며 “이번 개정안을 통해 부정수급업체에 대한 신속한 입찰제한과 부정수급 근절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