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남쿠릴열도를 사상 처음으로 방문했다. 남쿠릴열도는 일본이 북방영토라고 부르며 독도와 함께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는 땅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황이 악화하는 가운데 전격적으로 이뤄진 그의 이번 방문은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일본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러 밀착 속 제재 참여 日에 경고
교도·AFP통신 등에 따르면 시베리아·극동 지방을 순방 중인 푸틴 대통령은 이날 이투루프(일본명 에토로후·擇捉)섬을 찾아 수산물 가공공장 생산 라인을 시찰하고 연어알 등을 시식했다. 이어 이 지역 병원과 학교 등을 방문했다.
홋카이도 동북쪽에 있는 이투루프는 남쿠릴열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직전 집결했던 곳이다. 일본은 쿠릴열도 남단 4개 섬인 에토로후와 구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의 존재를 러시아보다 먼저 알게 됐고 일본인들이 이들 섬으로 건너가 통치를 확립했지만, 2차대전 막바지에 소련이 일본인 주민을 추방하고 군사력을 주둔시켜 왔다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앞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과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 등이 남쿠릴열도를 찾은 적은 있지만, 푸틴 대통령이 2000년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은 총리 시절(2008∼2012년)을 포함해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4년 반에 걸쳐 지속되는 가운데 ‘영토에 관한 타협은 없다’는 원칙을 국내외에 과시하고, 일본의 영토 반환 요구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선명히 하려는 의도라고 교도통신은 풀이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북한이 현재 9500명가량인 러시아 파견 병력을 11월 말까지 5만명으로 늘릴 것이라는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총국 자료를 인용한 보도가 나왔다. 북한군 배치 대상 지역은 현재 주력 병력이 파견된 쿠르스크주를 포함해 브랸스크주와 벨고로드주 3개 주로 알려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평화 협상이 이뤄질 경우 최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이는 돈바스 지역에 집중하기 위해 서부 3개 주에 있던 러시아군을 전선에 재배치하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총국은 북·러가 정상급 단위에서 이런 계획을 최종 승인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북·러 밀착 속에 푸틴 대통령은 남쿠릴열도 방문을 통해 일본 등 친우크라이나 진영에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도 해석된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극동 지역의 러시아 태평양함대 연습을 시찰하면서 “러시아가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일본은 우크라이나 사건을 핑계로 우리에게 제재를 가했다”며 일본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앞서 일본은 2022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국제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거”라고 규탄하며 서방의 대러 제재에 적극 동참했다. 러시아는 이에 반발해 남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일 평화조약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이 지역 공동 경제활동에 관한 협의에서도 탈퇴한 바 있다.
한국으로서도 더욱 선명해진 러시아의 동북아 군사 행보와 북·러 밀착이 부담이다. 러시아 태평양함대 활동이 강화하면 한·미·일 안보협력의 대응 대상이 지금보다 확대될 수 있다. 관련해 로이터통신은 이번 방문이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다음날, 한·미 대규모 연합군사훈련을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했다.
◆허 찔린 日 “강하게 항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이날 도쿄 총리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푸틴 대통령의 에토로후섬 방문을 강하게 항의한다. 일본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북방영토는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라고 밝혔다. 최근 중·일 관계가 크게 악화한 가운데 이번 방문으로 러·일 관계 역시 급랭할 전망이다. 일본은 이란 전쟁 발발 후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 왔지만, 이날 다카이치 총리는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 내 감정을 더욱 엄중하게 만들었다. 중장기적 관계 회복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날을 세웠다.
일본은 1993년 러시아와의 ‘도쿄 선언’을 통해 남쿠릴 4개 섬 귀속 문제 해결을 통한 평화조약을 조기 체결하기로 하고 실제 교섭도 벌여 왔던 만큼 이번 사안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외무성 고위 관계자는 NHK방송에 “러시아 측의 의도 분석과 필요한 대응 방안 검토를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