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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리뷰] “멈추면 사라지니까”… 94년을 달려온 고려인 이야기 ‘극장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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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초처럼 대륙을 떠돌아야 했던 고려인 이야기는 망국사에서도 특히 한(恨) 서린 대목이다. 고려극장은 그 한가운데 놓인 공간이다. 1932년 9월 9일 연해주 신한촌에서 개관한 후 스탈린 체제의 강제이주 정책에 휩쓸리면서도 중앙아시아에서 살아남아 올해로 창립 94년을 맞았다. 그 고행길에서 고려인들이 웃고 울며 쌓은 사연이 서울문화재단 광복 81주년 기념 특별기획 연극 ‘극장은 달린다!’로 무대에 올랐다. 쟁쟁한 작품이 유독 많았던 올여름 연극판에서도 큰 감동을 준 무대였다.

 

이야기는 연해주에서 머나먼 고국 소식을 궁금해하는 청년들에게 한 이야기꾼이 너희가 직접 극장을 만들어보라며 이야기 보따리를 넘기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극장을 만들기 위해 열린 오디션에선 사연도 재주도 제각각인 이들이 모인다. 배 타며 트럼펫을 배운 어부, 아코디언을 하는 청년, 북·장구·꽹과리를 다루는 풍물단장, 그리고 그냥 구경 왔다가 얼떨결에 합류한 어린 소녀까지 각양각색이다. 막상 극장이 문을 열자 모자에 별을 그려 넣은 소비에트 당원이 나타나 ‘깃발만 있으면 연극은 완성된다’며 공산당 선전극만을 주문한다. 이에 시달리면서도 어렵게 ‘춘향전’을 올리려던 참에 강제이주 명령이 떨어진다. 1937년 가을 두 달 동안 극동의 고려인 17만2000여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6400㎞를 끌려간 사건이다.

고려극장은 이때부터 달린다. 판소리 ‘춘향전’과 ‘심청전’을 슬기롭게 끌어다 부르면서 고려인의 기막힌 강제이주 역사를 마치 로드무비처럼 펼친다. 극장 의상실을 구성했던 옷걸이들이 긴 줄로 나란히 서며 기찻간을 만들고, 배우들은 그 속에서 뛰어내리고 올라타고 흔들리면서도 연해주에서 끝내지 못한 ‘춘향전’을 단 한 명의 승객을 위해 이어간다. ‘사랑가’로 시작해 ‘십장가’의 형틀에 이르는 동안 스탈린체제는 역마다 단원을 한두 명씩 강제로 내리게 한다. 연극계 기대주 오세혁의 맛깔난 극작에 변영진의 힘있는 연출이 무대에 몸을 던지다시피 하는 배우들 투혼과 결합하며 숨 멎을 듯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마침내 열차가 멈춘 막막한 벌판에서 소리꾼 출신 배우 전지원이 심청이를 부르는 대목은 피눈물 나는 그들의 고행을 실감케 한다. 단장과 단 둘만 남은 갈대밭에서 춘향을 연기하던 단원은 강 너머 아랄해를 인당수로 삼아 ‘심청전’을 하자고 한다. 관객도 대본도 없이 시작한 심봉사와 심청의 이별 대목은 끝을 보지 못하고 두 사람은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진다. ‘백만송이 장미’가 흐르는 가운데 무대에 등장한 카자흐 사람들이 말없이 그들을 구원한다.

 

그렇게 찾아온 새 정착지에서 이들은 다시 고려극장을 열고 흩어진 단원을 찾아 나선다. 수백 리를 마다 않고 고려인이 있는 곳이면 달려가는 극단 트럭이 정든 단원을 하나씩 다시 만나는 해후 장면은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든다. 고려극장은 그 길 위에서 스스로 고려인의 신문이자 우체국이 되어 계속 달리겠다고 선언한다. 실제로 이 극장은 개원 이래 1943년까지 1484편을 올려 39만7000명을 만났다. 돌출형 무대를 3면에서 둘러싼 객석 곳곳에서 관객들은 맞은편에서 눈물닦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은 실제 역사가 만들어낸 눈물이었다.

연극 ‘극장은 달린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연극 ‘극장은 달린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이 작품 배우들은 아코디언·트럼펫·기타·북을 직접 다루며 노래와 춤까지 소화한다. 양지해 음악감독은 판소리부터 러시아 노래 ‘카튜샤’와 ‘백만송이 장미’, 빅토르 최의 ‘혈액형’까지 이질적인 음악들을 낭비 없이 극에 결합시켰다. 우즈베키스탄 재외동포이자 고려인 4세인 배우 이사샤가 부르는 ‘아리랑’도 뭉클하다. 100분을 인터미션 없이 내달리는 동안 객석은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는다.

 

이번 공연은 중앙아시아 순회의 출정식 삼아 13·14일 단 이틀 동안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열렸다. 19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톡토굴 사틸가노프 명칭 키르기스 국립 필하모닉, 23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한국문화예술의 집, 27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칼리베크 쿠아니시바예프 카자흐 국립 뮤지컬·드라마극장에서 고려인들을 만난다. 현지 공연에서 이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을지 능히 짐작케 하는 무대이다. 단 이틀 공연으론 아쉬운 작품인 만큼 재연이 기다려진다.

 

친일의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해 잇달아 논란이 빚어지는 요즘은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 뼈저린 시대다. 연해주에서 시작된 고려극장 이야기가 지금 다시 불려 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멈추면 사라지니까, 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