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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염색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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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

색색의 과일을 용기에 넣고 여름을 누른다.

유리컵에 여름을 따라 마신다.

온 몸속으로 퍼져 가는 여름의 빛깔들.

 

우산 손잡이를 쥔 팔에 빗물이 스며들고

당신의 늑골 속엔 노을빛에 물든 새 한 마리 깃든다.

 

꽃으로 가득한 집 앞에서

붉은 바람이 불었고 색들은 쌓여 가지만

내게 남은 추억은 흐릿해진다.

 

엄마도 희미해지고

아이들의 색채도 차츰 옅어진다.

 

(중략)

 

바다에 팔을 담그면

어깨는 물빛,

목은 보라,

얼굴은 파랗게 질려 버린다.

온몸이 색에 물들어 경련한다.

계절은 이제 슬며시 가을 쪽으로 기울고 있다. 무섭도록 성하던 여름의 빛깔도 차츰 바래어갈 것이다. 아직은 뚜렷한 초록이 눈앞에도, 몸속에도 남아 있지만. 시 속 사람은 여름내 쌓여 가던 색들 사이에서 어떤 흐릿함을 경험한 듯하다. 소중한 것들이 차츰 옅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의 마음이 슬픔으로 염색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짐작하겠다. 슬픔은 어떤 색일까. 몹시도 질린 파랑? 멍이 든 보라? 결국은 물빛을 닮은 투명 아닐까.

 

계절이 바뀐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다만 속수무책이라는 것. 이런 것이야말로 슬픔의 진짜 빛깔인지 모른다. 시시각각 흩어지는 기억만큼이나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 그런 것들일수록 더 빨리 잃어버리곤 한다. 불현듯 손에 힘이 들어간다. 빈 손바닥을 오므려 만든 주먹을 힘껏 쥐어 본다. 느닷없이 땀이 조금 고이는 것 같다.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