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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소리 후 흙더미가…” 800㎜ 극한 호우가 할퀴고 간 거제 [남부 물폭탄]

거제·통영 관측 사상 최다 호우

도로 끊겨 교통 마비… 상점들 침수
양대 조선소 “출근 말라” 공지도
통영선 매몰 주민 사투 끝 구조

중국發 남풍·고수온 만나 폭우
경남 남해안 괴롭힌 가뭄은 해소
“지반 약해져 2차 산사태 대비를”

17일 새벽, 산과 인접해 있던 경남 거제시 옥포동의 한 아파트단지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간당 110㎜가 넘는 맹렬한 빗줄기가 퍼붓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산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다. 쏟아져 내린 붉은 토사는 아파트 저층을 순식간에 덮쳤다.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한 주민은 “갑자기 ‘쿵’ 하는 천둥 같은 소리가 나더니 흙더미가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산사태 참변 아파트 17일 경남 거제시 옥포동 한 아파트 입구가 산사태로 흘러내린 토사와 파손된 시설물, 집기 등으로 아수라장이 돼 있다. 거제=연합뉴스
산사태 참변 아파트 17일 경남 거제시 옥포동 한 아파트 입구가 산사태로 흘러내린 토사와 파손된 시설물, 집기 등으로 아수라장이 돼 있다. 거제=연합뉴스

신고를 받고 긴급 출동한 소방구조대와 경찰이 진흙밭으로 변한 현장에 투입돼 주민 구조에 나섰다. 매몰된 1층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주민 A씨는 끝내 숨졌다. 함께 구조된 주민 2명 역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곤리리에서도 이른 아침 산사태가 발생해 주민 B씨가 토사에 매몰됐다. 통영해양경찰서와 구조대는 장대비 속에서 1시간30분가량 사투를 벌인 끝에 B씨를 구조했다. B씨는 양쪽 다리 골절이 의심되고 저체온증 증상을 보였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극한 호우가 할퀴고 간 거제

이번 광복절 연휴 사흘간 경남 남해안 일대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록적인 ‘물폭탄’이 쏟아졌다. 지난 15일부터 17일 오전까지 거제시의 누적 강수량은 무려 813㎜에 달했다. 특히 17일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단 6시간 동안 거제 장평동 일대에만 508.8㎜의 극한 호우가 집중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제 도심 곳곳의 도로 아스팔트 조각이 거센 물살에 맥없이 뜯겨 나갔고, 점포들의 유리창이 깨지거나 건물 내부로 침수 피해가 잇따랐다. 피해 지역 주민들은 대야를 들고 침수된 점포 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연신 퍼내느라 바빴다.

물난리 난 도심 도로 17일 시간당 124.5㎜의 물폭탄이 쏟아진 경남 거제시 장평동에서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휘말린 차량들이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YTN 화면 캡처
물난리 난 도심 도로 17일 시간당 124.5㎜의 물폭탄이 쏟아진 경남 거제시 장평동에서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휘말린 차량들이 위태롭게 이동하고 있다. YTN 화면 캡처

시내 택시 운행도 일시 중단되는 등 교통마저 끊겼다. 장평동 등 8개 지역에서 주민 82명이 인근 주민센터와 마을회관으로 긴급 대피했으며, 50여명의 주민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대피소에서 불안한 밤을 지새웠다.

 

거제지역 양대 대형조선소도 노동자들에게 출근이 불가하다고 안내하거나 출근 대기를 통보했다. 한화오션은 전사방재종합상황실을 통해 “집중호우로 인한 거제 관내 도로 통제 중으로 출근이 불가하다”고 공지했다. 삼성중공업도 특근 노동자들에게 “출근하지 말고 대기해 달라”고 알렸다.

17일 경남 거제시 옥포동 일대에서 경찰이 침수 된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경남 거제시 옥포동 일대에서 경찰이 침수 된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배움터 역시 비 피해를 비껴가지 못했다. 거제 외간초·장평초·거제애광학교 등과 통영 중·고교 및 유치원 등 교육시설에서 건물과 운동장이 물에 잠겼다. 경남교육청은 긴급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예비비를 투입해 응급 복구작업에 들어갔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자체와 관계 기관의 대응도 분주하게 이어졌다. 경남도는 18개 전 시·군에 ‘2차 피해 방지’ 특별지시를 내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번 폭우는 경남지역을 최근 괴롭혀온 극심한 가뭄을 일부 해갈시켰다. 연휴 전인 14일 32.2%에 불과했던 경남 18개 시·군의 농업용수 평균 저수율은 17일 오후 4시 기준 45.1%로 대폭 상승했다. 특히 28.7%까지 떨어져 바닥을 보이던 거제시의 저수율은 75.1%로 급상승하며 평년 수준(78.2%)을 거의 회복했다.

◆거제와 통영에 많은 비가 내린 이유는

거제뿐만 아니라 다른 남부지역에서도 나무가 쓰러지고 도로가 침수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16일 정오쯤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산간도로인 515도로 숲터널에서 나무가 쓰러져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앞서 오전 10시50분쯤에는 서귀포시 남원읍에서도 나무가 쓰러지며 도로를 침범해 안전조치가 이뤄졌으며, 오전 7시5분 서귀포시 법환동에서는 도로에 물이 차 배수작업이 진행됐다.

특히 거제와 통영에 1972년 관측 개시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린 것은 중국 쪽에서 발달한 저기압 영향으로 남쪽에서 고온다습한 바람이 강도 높게 유입됐기 때문이다. 광복절 연휴 동안 전국에 내린 비는 제13호 태풍 돌핀이 중국 상하이 부근에 이르러 약화한 저기압이 우리나라 남서쪽으로 접근한 영향이었다. 북반구에서는 저기압의 경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결과적으로 남풍이 우리나라 쪽으로 불면서 지형과 출동해 남해안과 제주에 비를 쏟아낸 것이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호우 대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호우 대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특히 저기압이 우리나라로 다가올수록 북동쪽 고기압과 거리가 가까워져 그 사이 바람길이 좁아졌고, 그 영향으로 남풍 또한 강도를 올리면서 강수량이 늘 수밖에 없었다. 남해쪽 해수면 온도가 27∼28도로 높은 점도 남풍에 수증기가 많이 실리게 해 강수량을 큰 폭으로 증가시키는 요인이 됐다.

윤호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장(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중대본 회의에서 “고립 주민 구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주시기 바란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전남광주·부산·경남지역에 특별교부세 30억원과 재난구호사업비 4000만원을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