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등지고 서 있는 커다란 기와지붕과 그 앞에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쌍탑.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겨레의 탑’ 아래에 이를 때까지, 관람객은 이 장면을 바라봐야 한다. 탑을 지나도 관람객은 흑성산을 배경으로 ‘독립기념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거대한 ‘겨레의 집’을 보며 걸어야 한다. 입구에서부터 900여m, 성인 걸음으로 15분 남짓한 거리를 이 변하지 않는 장면만을 보며 걷는다. 마치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이견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다다른 ‘겨레의 집’ 앞에서 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기단을 만난다. 심리학에서 높은 위치에 상품을 전시함으로써 얻는 선전효과를 ‘기단효과’라 부른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어떤 건축물이 특별하고 고귀하며 심지어 비범하다는 인상을 주려 할 때 일반적으로 높은 기단 위에 놓인다. 그러나 기단 위에 놓인 건물은 우리의 삶과 기단의 높이만큼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기단을 올라 ‘겨레의 집’ 안으로 들어서면 웅장하고 비장한 느낌의 조각상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우리나라 8도(道)의 전 민족을 상징한다는 8명이 관람객이 걸어온 방향을 가리키며 나아가는 형상이다. 작품설명에 따르면 “자유, 정의, 인도, 인류평화를 향한 전진”의 자세로 “불굴의 독립정신과 강인한 한국인상(像)을 표현”한다고 한다. 작품설명 옆에는 ‘겨레의 집’을 소개하는 안내판도 있다. 그 설명에 담긴 건 길이, 폭, 높이, 지붕 면적, 동(銅)으로 만든 기와의 개수, 기둥의 지름과 높이, 그리고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라는 문구뿐이다.
숫자와 크기로만 설명되는 ‘겨레의 집’을 지나면 7개의 전시관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관들은 ‘3·1문화마당’을 중심으로 반경 170m 안에 밀도 있게 군집돼 있다. ‘겨레의 뿌리’에서 시작해 ‘겨레의 시련’과 ‘겨레의 함성’을 거쳐 ‘평화누리’와 ‘나라 되찾기’를 지나 ‘새로운 나라’에서 끝나는 전시관들의 주제만 연결해도 이 공간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바로 “우리는 온당히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문화와 역량을 갖춘 민족이며, 역사 속에서 스스로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이다.
하지만 정작 관람객은 이 메시지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루는 방대한 전시 내용에 압도된다. 실제로 문화와 관련된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에 대한 전시물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근현대사 부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겹친다. 그리고 ‘조선의 도시계획’과 같이 독립과 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전시물도 있다. 7개 전시관을 빠르게 훑어보는 데도 몇 시간이 걸리며, 박물관 피로(Museum fatigue)는 상당하다. 그 피로가 마치 ‘독립’을 이루는 어려움처럼 느껴진다.
독립기념관의 배치, 한옥의 형태, 전시 내용이 지금처럼 결정된 건 1983년 수립된 기본계획에서였다. 이 계획은 현상설계를 하기 전 단계에서 만들어졌다. 건축비평가 박정현은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건축가 김원이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부설 환경계획연구소와 함께 이 기본계획 수립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후 진행된 현상설계는 사실상 이미 확정된 배치계획에 건물만 설계하는 방식이었다고 그는 평했다(‘독립기념관의 건립과정과 담론 변화에 관한 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지 통권 109호).
김원이 수립한 기본계획을 보면, 흑성산의 가운데 계곡(中谷)을 따라 주차광장-진입광장-독립대문-독립연(淵)-상징조형물-메모리얼 홀-썬큰플라자-추념의 장이 하나의 축 위에 배치돼 있고 상설전시장과 연구관리동이 메모리얼 홀 뒤편에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현재와 거의 같은 구조다. 무엇보다 김원은 건축물의 형태에 대한 설계지침으로, 모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전통언어로 한국적 건축을 표현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현상설계에 당선된 김기웅의 안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기와지붕 건물은 하나가 아니라 다섯 채였다. 이 건물들은 하나의 축선 상에 일직선으로 놓여, 마치 산사(山寺)에 진입할 때처럼 각기 다른 영역으로 들어서는 문(門)이 되도록 설계됐다. 다섯 채 중 중심을 이루는 메모리얼 홀(現 겨레의 집)의 지붕은 ‘人’자 형태의 맞배지붕이 아니라 앞면과 뒷면의 길이가 달랐고, 단면도를 보면 두 면은 떨어져 있다. 아마도 그 틈을 통과한 빛이 메모리얼 홀 내부로 스며들어 극적인 연출이 일어나도록 한 것 같다. 무엇보다 메모리얼 홀은 1층과 2층 모두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높은 기단 위에 올려져 스스로 특별함을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라, 경복궁의 경회루나 부석사의 안양루처럼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김기웅의 안이 지금처럼 바뀌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도 건축가 김원이었다. 이에 대해 박정현은 김원이 1960년대 군사정부 시절 군인 출신의 문화재관리국장이 했던 역할을 1980년대에 했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김원도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인이 아닌 건축가가 그 역할을 맡았으니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은 군인이 만든 ‘한국적 건축’이라는 프레임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채 여전히 한옥을 닮은 건축물이다. 당시 건축가들은 기존 프레임을 대신할 대안을 스스로 세우지(自立) 못했다.
육중한 콘크리트 한옥 지붕 아래 서서, 공감하기 힘든 국가적인 거대 서사 대신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독립기념관을 만든 이들은 이곳을 찾아온 국민이 엄청난 규모와 장엄한 서사를 지닌 조각상과 건축물 앞에서 감명을 받고 경외감을 느끼기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외감(敬畏感)은 자신이 어느 한 부분이고 그것에 속해 있으며, 중요한 역할로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해야 한다고 건축가 유진 래스킨은 말했다(‘건축으로 말하기’, 픽셀하우스). 많은 국가적 기념비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기단에 걸터앉아 현상설계에 제출됐던 다른 설계안들을 떠올려 보던 중, 어디선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닷빛의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은 학생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아이들 등에는 “울릉초등학교에서 수학여행 왔어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순간, 대한민국 영토의 동쪽 끝자락, 일본이 수없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독도 바로 옆에서 사는 섬 아이들에게 독립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국가든 개인이든 독립을 이룬 후에 겪는 진짜 어려움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이다. 피 흘려 싸워 쟁취했든, 갑작스럽게 찾아왔든, 원하지 않게 당했든, 모든 독립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독립만큼이나 그 이후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즉 ‘자립’이 중요하다. 개인의 자립도 마찬가지겠지만 국가의 자립은 몇몇 개인이 잘한다고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개관 39주년을 맞은 독립기념관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국민 개개인의 수고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독립 후 81년간 자립해 올 수 있었다는, 현재의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담담한 인정이어야 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