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채권을 살 여력이 없었어요.”
지난달 9일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작은 마을 리트(Lieth)에서 만난 울리 클라이스트(65·남)씨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그의 등 뒤로 아담한 주택들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진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회전하는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보였다.
디트마르셴군에 속한 리트는 주민 370여명이 사는 독일의 작은 마을이다. 북해와 바덴해에 인접해 바람 자원이 풍부한 덕분에 수십 대의 풍력발전기가 마을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디트마르셴의 면적당 풍력발전 설비용량은 1㎢당 1670킬로와트(kW)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리트에서 26년째 살고 있는 울리 씨는 과거 마을에서 열린 ‘에너지 시민채권 설명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도로변의 붉은색 식당 건물을 가리키며 “바로 저곳에서 설명회가 열렸다”며 “풍력과 같은 에너지 시설의 지분을 주민이 일부 사들여 투자하고, 연말이면 그에 따른 수익을 나눠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독일·네덜란드 송전망 운영사 ‘테넷’(Tennet)은 ‘송전선로 시민채권(Bürgeranleihe)’을 이곳에서 처음 시험했다. 주민이 직접 송전선로 건설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금융상품을 만들었다. 독일 북부에서 생산한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남부로 보내기 위해 지난 2013년 서해안송전선로(Westküstenleitung) 건설을 추진하면서 디트마르셴·노르트프리슬란트군 주민과 토지 소유자를 대상으로 채권을 우선 판매했다. 주민에게 투자 수익을 돌려줌으로써 사업에 대한 수용성을 높이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참여 의사를 밝힌 주민은 많지 않았다. 울리 씨 역시 채권을 사지 않았다. 그는 “새집을 짓고 있던 때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며 “여윳돈이 있는 다른 주민들도 채권을 사기보다는 집을 고치거나 난방 설비를 설치하는 데 돈을 썼다”고 말했다.
리트 지역의 시장인 라이머 비트(75·남)씨도 “과거 풍력발전 채권에는 참여한 적이 있지만 송전선로 채권에는 앞으로도 참여할 생각이 없다”며 “송전선로는 주민이 실질적으로 얻는 이익이 적고 국가나 주정부 등이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민채권은 실패로 끝났지만 서해안송전선로는 8년에 걸쳐 138km에 이르는 5개 구간이 완공됐다. 리트의 주택가 끝자락에서 3분가량 외곽으로 걸어 나가자 풀밭 위 각종 변전 설비가 빽빽하게 들어선 하이데 서부 변전소(UW Heide West)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룬스뷔텔과 덴마크 국경을 잇는 서해안송전선로도 이곳 변전소를 거친다. 변전소 주변의 전기 선로들이 공중에서 겹겹이 포개지고 갈라져 촘촘한 거미줄을 펼쳐놓은 듯했다.
◆독일이 꺼낸 ‘국민 투자’…한국도 73조 전력망에 활용
13년 전 독일이 시도한 실험을 이번에는 한국이 이어받게 됐다.
정부가 2038년까지 약 73조원을 투입해 송배전망을 지금보다 70%가량 늘리는 대규모 전력망 확충에 일반 국민과 지역 주민의 ‘투자’를 받겠다는 구상을 밝히면서다.
그중 하나가 국민성장펀드다. 국민성장펀드는 반도체·인공지능(AI)·바이오 등 첨단 전략산업에 5년간 150조원을 공급하는 정책금융 수단이다. 이 가운데 일반 국민이 직접 투자하는 국민참여형 펀드(국민참여성장펀드)는 올해 1차로 일반 국민 자금 6000억원과 정부 재정 1200억원을 합쳐 7200억원 규모로 조성됐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력망 수익 공유’는 주민수용성과 재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까.
전력망 건설에 국민 자금을 끌어들이자는 구상은 지난해 12월 처음 구체화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2월17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에게 투자 기회도 드리고 송·배전망을 대대적으로 신속하게 까는 것이 어떻겠냐”고 주문하면서다. 이 대통령은 “어차피 송전망은 한전에서 쓸 수밖에 없고 그 요금은 정부가 손해 보지 않는 수준으로 정할 것이니 이렇게 안전한 투자가 어디 있냐”라며 전력망 건설에 국민성장펀드를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 이후로 국민성장펀드 방식이 막대한 전력망 건설비를 마련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투자 수익을 돌려줘 건설 반대 여론까지 낮출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됐다. 언론에서도 송·배전설비가 들어서는 지역 주민을 직접 투자 주체로 참여시키면 국책사업을 둘러싼 갈등을 줄이고 전력망 건설의 주민 수용성까지 높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민성장펀드 설계 방식에 따라 주민 수용성엔 오히려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송전망이 주로 들어서는 농어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투자 여력이 부족한 만큼 정작 지역 주민은 투자에서 소외되고, 수익은 자금력이 있는 타 지역 투자자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원 조달 역시 주민 협의와 인허가를 마쳐 곧바로 착공할 수 있는 사업이 충분하지 않다면 펀드가 흥행해도 자금 집행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주민은 오히려 ‘소외’… 주민수용성엔 악재
국민성장펀드는 송전망 건설의 최대 난관인 ‘주민 수용성’ 확보에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독일 테넷의 시민채권 역시 송전망 건설비를 조달하는 동시에 주민에게 경제적 이익을 나눠 수용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두 목표 모두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독일 아헨공과대 라인하르트 마들레너 교수 등이 지난해 발간한 ‘독일과 미국의 중기 송전망 프로젝트를 위한 금융 메커니즘과 공동편익 평가’ 보고서는 테넷 시민채권을 위험·수익 구조와 대중 수용성, 재무적 성공 가능성 측면에서 모두 ‘부정적 사례’로 분류했다. 시민채권에는 약 100가구만 참여해 88만3000유로(약 14억원)가 모였다. 당초 목표였던 3000만유로(약 486억원)의 3%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보고서는 높은 최소 투자금과 복잡한 상품 구조, 위험 대비 낮은 수익성이 흥행 부진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시민채권이 주민과의 실질적 소통보다는 ‘수용성을 돈으로 사려는 시도’로 인식된 측면도 있었다고 봤다. 농촌 지역의 투자 여력도 한계였다. 최소 투자금은 1000유로였는데, 사후 설문에서 주민의 47%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라고 답했다.
주정부 역시 테넷의 시민채권 방식으로 주민 수용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요슈카 크누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에너지·기후·환경부 차관은 “서해안송전선로 시민채권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은 크지 않았고 반응도 미지근했다”며 “주민의 재정 참여를 통해 수익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는 주민 수용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주정부는 계획 초기부터 시민 참여를 보장하고, 송전망 건설이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크누트 차관은 “주민수용성 확보를 위해서는 이곳에서 생산한 전기를 전부 남쪽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배터리 충전시설과 대규모 데이터센터, 인공지능(AI) 관련 시설처럼 전력 소비가 많은 사업을 지역에 유치해 지역 내에서 가치가 창출되도록 하는 것이 결국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성장펀드는 독일 시민채권보다 여건이 더 까다롭다.
국민성장펀드는 기본적으로 지역 주민을 넘어 일반 국민의 자금을 모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6월 판매된 국민성장펀드 투자자 구성을 보면 자금 여력이 적은 서민층의 참여 비중은 높지 않았다. 국민의힘 김상훈 의원실이 금융위원회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근로소득 5000만원 이하 서민 가입자는 전체 가입자의 28%(증권사 기준)에 그쳤다. 향후 전력망 펀드 역시 투자 여력이 큰 계층에 쏠려 정작 송전망 주변 주민은 이익 공유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전력망이 건설되는 곳은 도심보다 농어촌이나 외곽지역이 대부분”이라며 “지역 주민 상당수는 펀드에 가입할 자본 여력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주민 입장에서는 피해만 보고 돈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번다는 인식이 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 주민에게 투자 기회를 우선 부여하거나 더 높은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보완하기도 현재로서는 쉽지 않다. 자본시장법상 공모펀드의 투자자를 특정 지역 주민으로 제한하거나 거주 지역에 따라 수익률을 달리하는 데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재원 조달 효과는?… ‘투자할 사업’ 확보가 관건
국민성장펀드는 재원 조달 측면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 시각이다. 다만 모인 자금을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레디 투 빌드’(RTB·Ready To Build) 사업을 얼마나 확보하느냐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과거 정책형 펀드의 흥행 사례를 감안하면 국민성장펀드 역시 투자자 모집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출시된 국민참여 뉴딜펀드는 1차 일반투자자 물량 1460억원이 판매 시작 일주일 만에 모두 팔렸고, 같은 해 추가 출시된 2차 상품도 판매사별로 조기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올해 국민참여성장펀드도 5월22일 판매를 시작해 5영업일 만에 6000억원 전액이 완판됐다.
한국증권학회장을 역임한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민참여성장펀드는 정부 자금이 후순위로 들어가 손실의 일정 부분을 먼저 부담하는 구조”라며 “일반 투자자 입장에서는 위험성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전채’에 집중된 전력망 투자 재원을 다각화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대안이라는 평가다. 대규모 부채를 안고 있는 한전이 한전채 발행에만 의존해 필요한 73조원의 자금을 모두 마련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조달 창구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전채를 일정 규모 이상 계속 발행하면 원래 4% 수준이던 조달금리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한전채를 한도 없이 발행할 수는 없는 만큼, 부족한 자금의 일부를 상대적으로 비싼 민간 자금으로 조달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성장펀드가 실제 전력망 재원으로 자리 잡으려면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5년의 투자 기간 안에 주민 협의와 인허가를 마치고 착공 단계에 이른 송전망 사업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 국민의 자금이 들어가는 만큼 사업 불확실성이 낮은 이른바 ‘레디 투 빌드’ 단계의 사업에 투자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윤태환 루트에너지 대표는 “문제는 당장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인허가가 진척된 사업이 충분하냐는 것”이라며 “입지를 둘러싼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대로 인허가 시점을 예측할 수 없는 사업에는 투자할 돈이 아무리 많아도 금융을 집행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세명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도움 주신 분들>
요슈카 크누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에너지·기후·환경부 차관, 피테 불프 독일 연방네트워크청 공보실장,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윤태환 루트에너지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