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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딸 죽인 범인 싣고 경주로…네 모녀의 기막힌 복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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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기행’ 김미조 감독 “‘끝까지 가는’ 사람의 얼굴 보고 싶었다”

엄마 옥실(이정은)과 세 딸 장주(공효진), 영주(박소담), 동주(이연)는 8년 전 경주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한 남자에게 살해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의 생일을 맞아 경주로 가족여행을 떠난다. 단체 티셔츠까지 맞춰 입은 네 모녀는 얼핏 단란한 경주기행에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봉고차 트렁크에는 경주를 죽인 범인이 실려 있다. 8년 전 범행을 저지르고 얼마 전 출소한 그놈이다. 여행은 알리바이, 목적은 복수다.

영화 ‘경주기행’ 속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 속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26일 개봉하는 영화 ‘경주기행’의 로그라인을 보면 치밀하게 설계된 복수극을 예상하기 쉽다. 하지만 인물들은 복수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일대오로 질주하지 않는다. 네 모녀는 여행이 진행될수록 분열한다. 엄마의 오른팔 장주, MBTI ‘TJ’ 타입이 분명한 냉철한 전략가 둘째 영주, 프로레슬러 출신 무대포 셋째 동주. 저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이들은 여정을 거치며 조금씩 속내를 드러낸다.

 

결연히 길을 나선 네 모녀는 벌레 한 마리에 호들갑을 떨고, 복수의 제물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가족이 겪은 비극에 찔끔 눈물이 났다가도 킥킥 웃게 된다. 그 순간 네 모녀는 ‘비극의 피해자’라는 한 묶음으로 뭉뚱그려지는 대신 저마다 욕망과 성격을 가진 개체로 보인다. 

 

‘경주기행’은 60대 성폭력 피해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그린 독립영화 ‘갈매기’(2020)로 주목받은 김미조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여성 제작자(박선혜 스튜디오하이파이브 대표), 여성 감독, 여성 주연배우들이 의기투합한 드문 한국 상업영화이기도 하다. ‘경주기행’을 좋아할 수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국형 가족 복수극’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김미조 감독을 만났다.

김미조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김미조 감독.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경주기행’은 가족이 범인을 직접 데려가 복수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관객이 이들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지가 중요했을 것 같다.

 

“사적 제재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옥실의 선택을 보며 관객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해’라는 감정보다 ‘나라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게 목표였다. 가족 개개인이 내리는 선택과 갈등에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중요했다. 동시에 재미와 장르적 긴장감을 살려야 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확실히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유머러스하다. 비극을 겪은 가족 이야기에 코미디를 섞은 이유가 있나.

 

“내 아버지가 굉장히 유머러스한 분이다. 대입 4수를 했는데, 수능을 네 번 치르는 나를 못마땅하게 보기보다 항상 웃음으로 넘기셨다. 아버지가 그런 성향이다 보니 가족 전체가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어도 많이 웃는 편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내가 쓴 이야기에도 그런 내 특성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부담 없이 제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하는 태도가 이 영화에 맞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랑스러운 가족에게 이런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마음을 놓고 시작해야 이 가족을 조금 더 응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2014년 경주로 가족여행을 갔다가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떠올렸다. 우비를 입고 대릉원을 걷는 가족의 모습을 보는데 굉장히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경주하면 화창하고, 밝고, 벚꽃이 핀 예쁜 풍경을 먼저 떠올리지 않나. 그런데 낮에는 화창했다가 저녁에는 비가 오고 들쑥날쑥한 날씨를 경험하니 경주의 다양한 얼굴을 보게 됐다. 그곳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들이 경주에 온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경주라는 공간에서 떠오른 이미지가 영화의 이야기로 확장된 과정은.

 

“매일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보며 느낀 내 시선과 감정이 이야기에 담겼다. ‘왜 비극적인 일이 자꾸 일어날까’,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점이 늘 궁금했다. 그 모든 것이 이 영화에 담겼다. 영화가 결국 나다.”

 

—전작 ‘갈매기’에서는 중년 여성이 여러 겹의 억압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번에도 중년 여성 옥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이 결국 해내는 이야기에 쾌감을 느낀다. 고도로 훈련된 살인 병기나 트레이닝된 사람이 아니라,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해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그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옥실에게는 페널티가 많다. 중년 여성이고, (물리적) 힘이 강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도 아니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딸들이 있다. 그런 인물이 가슴 속 불덩이를 꺼뜨리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까. 그게 굉장히 궁금했다. 끝까지 가서 자기 안의 불덩이를 꺼뜨리고, 진정한 의미의 이별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옥실 역으로는 오래전부터 이정은 배우를 염두에 뒀다고.

 

“이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한 2014년부터 옥실은 이정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대학로 연극 시절부터 그가 보여주는 감정적인 울림과 깊이를 늘 동경했다. 영화 ‘오마주’(2022, 신수원 감) 스크립터를 하며 모니터 넘어 그의 연기를 볼 기회가 있었고, 그때 그가 옥실임을 더욱 강하게 확신했다.”

—유가족의 복수를 시나리오로 쓰며 실제 유가족의 심리도 많이 들여다봤을 것 같다.

 

“자료조사를 많이 했다. 유가족 심리상담 전문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유가족이 복수를 감행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더라. 전문가 말씀을 들으니, 인간의 뇌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을 묻어두려 하는 게 뇌의 작동 기제라는 거다. 그런데 또 궁금해졌다. 시간이 지나도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흔히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용서라는 그 깊은 감정에 대해 쉽사리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복수 역시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감정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용서도 있겠지만, 정말 끝까지 가야 해결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끝까지 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옥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가 나도 정말 궁금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네 모녀의 속내가 드러나고 균열이 발생한다.

 

“가족이 처음 등장할 때 군대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단체 티셔츠도 갖춰 입혔다. 한마음 한뜻으로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해 똘똘 뭉친 가족처럼. 그런데 여정을 거치면서 각자의 마음이 하나씩 드러난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속성이 바로 그렇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같지만, 개개인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마음은 엄청나게 다르다. 그래서 이 가족이 여정을 통해 붕괴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그 붕괴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숨겨왔던 마음을 드러내면서 집단이 깨지고,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영화에는 복수와 관계없는 생활의 순간들이 많다. 벌레 소동이나 식사 장면, 가족끼리 옥신각신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복수하러 가는 길에도 분명히 배는 고프고, 화장실도 가야 하고, 누군가 사고도 칠 거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복수극이다. 사실 복수를 하자면 이렇게 많은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 비효율적인 복수극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생각하다 보니 그런 장면들이 담겼다. 일부러 넣었다기보다는 ‘가족 이야기니까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컸다.”

 

—반대로 범인이 저지른 악행이나 경주가 겪은 사건은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장르적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잔혹한 장면들을 극대화해 장르적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법도 고민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잔인한 장면을 묘사하는 게 과연 맞을까 싶었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이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 ‘경주기행’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실제 네 자매의 막내딸이다. 영화 속 자매들의 성격과 관계에도 실제 가족의 모습이 투영됐나. 

 

“셋째 언니가 동주처럼 프로레슬러 출신이다. 경영학과 출신 둘째 언니는 영주처럼 잘난 사람이다. 첫째 언니는 ‘엄마를 어떻게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한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나는 부모님을 만족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 몰래 자퇴도 했고, 4수 해서 사범대에 들어가고도 얌전히 선생님이 되는 대신 몰래 영화를 공부했다. 하여튼 난리를 쳤다. 부모님의 만족보다 내 만족이 늘 우선했다. 그러니까 큰언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정말 이상했다. 언니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엄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딸들마다 너무 다르더라. 엄마는 딸들 수만큼 얼굴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지점이 영화 안에 많이 투영된 것 같다.”

 

—‘가족’은 감독의 영화에서 중요한 화두다. 앞으로도 그럴까.

 

“이 영화를 만들며 내 안에 있던 가족에 대한 화두가 많이 해결됐다. 내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살풀이’에 가깝다. 궁금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작품 안에 쏟아붓고 나면 ‘아,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다음 작품에는 다른 주제로 넘어갈 것 같다. 사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같은 영화를 정말 만들고 싶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