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이란 신정체제는 여전히 버티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군 수뇌부가 대거 제거되고 주요 군사시설이 잇따라 파괴됐지만 체제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미국은 군사적 압박에 더해 고강도 경제 제재까지 꺼내 들었다.
이란에서는 오히려 지금이 전쟁을 끝낼 적기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우리가 힘과 존엄을 갖추고 있는 지금 전쟁을 끝내는 것이 더 낫다”고 밝혔다. 반년 가까이 미국의 공세를 견뎌낸 만큼 종전 협상에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지난 2월28일 대규모 공습을 시작하면서 이란의 권력 핵심부와 군사시설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사망하고 군 지휘부도 큰 타격을 입었다. 미 국방부는 개전 3주 만인 3월19일까지 이란 내 7000개가 넘는 표적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이슬람공화국의 통치체제는 유지됐다. 최고지도자 사망 이후에도 권력 승계가 이뤄졌고 이란혁명수비대를 비롯한 군과 행정기구도 계속 가동됐다. 군사력만으로 이란을 굴복시키지 못한 미국은 경제 압박의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20일 이란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예고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에도 미국이 이란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약 1000년 전 페르시아에서 쓰인 한 권의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도부 제거했지만 체제는 건재
이란 출신 정치사상가 니잠 알 물크(1018~1092)가 쓴 [정치의 서]다. 셀주크 제국(1038~1194)의 전성기를 이끈 재상인 니잠 알 물크는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샤를 보좌하며 30년 가까이 국정을 맡았다. 말년에는 말리크샤의 요청을 받아 오랜 국정 경험을 토대로 [정치의 서]를 집필했다. 모두 50장으로 구성된 [정치의 서]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부터 관료제와 군대, 정보조직, 조세와 사법, 민생까지 국가 통치 전반에 대한 그의 경험과 철학이 담겼다.
약 1000년 전 쓰인 이 책은 최근 유달승 한국외국어대학교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30년 넘게 이란을 연구해온 유 교수는 한국외대에서 페르시아어와 중동지역학을 공부한 뒤 이란 테헤란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테헤란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첫 외국인이다.
유 교수는 지난 6월 이란 테헤란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문학과 번역을 통한 이란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적 사건만 들여다봐서 한 나라의 문명과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의 서]가 1000년의 시차를 넘어 오늘날 이란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는 대목이다.
◆1000년 전 통치론으로 본 이란
니잠 알 물크는 국가를 지탱하는 힘을 군주 개인에게서만 찾지 않았다. 군대의 규율과 위계가 무너지고 자격 없는 이들이 관직을 차지하거나 관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경계했다. 반대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능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군대와 관료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주의 권위만큼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과 질서를 중시한 것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는 조언과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니잠 알 물크는 군주에게 “지혜로운 원로들, 충직한 신하들, 그리고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라고 주문했다.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모든 분야에 정통할 수 없는 만큼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고 봤다.
물론 11세기 셀주크 제국과 오늘날 이란 이슬람공화국을 그대로 연결할 수는 없다. 이슬람공화국의 정치제도가 니잠 알 물크의 정치사상을 계승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정치의 서]가 강조한 조직과 질서의 중요성은 최고지도자와 군 수뇌부를 잃고도 이란의 국가 기능이 유지되는 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이란의 권력구조는 최고지도자를 정점으로 혁명수비대와 정규군, 정보기관, 사법부와 행정부, 의회, 종교 엘리트와 지방행정조직 등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최고위급 인사나 지휘관이 제거되더라도 후임자를 세우고 조직을 계속 가동할 수 있는 구조다. 미국이 이란 권력의 정점을 타격하고도 국가 전체를 마비시키지 못한 배경에는 이 같은 조직적 복원력이 자리하고 있다.
[정치의 서]에서 군대의 구성에 별도의 장을 할애한 점도 눈길을 끈다. 니잠 알 물크는 “군대가 단일한 민족으로만 구성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술탄 마흐무드의 군대에 튀르크인과 호라산인, 아랍인, 힌두인, 구르인, 다일람인 등이 함께 복무한 사례를 들며 서로 다른 집단이 경쟁하는 구조가 군대의 긴장과 전투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왕조는 바뀌어도 살아남은 페르시아 관료제
이를 혁명수비대와 정규군, 바시즈 민병대 등 오늘날 이란의 군사조직과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 다만 특정 조직이 큰 타격을 입더라도 국가의 군사체계 전체가 곧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번 전쟁에서도 드러났다.
이란이 오랜 세월 축적해온 국가 운영의 경험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79년 출범한 이슬람공화국의 역사는 47년에 불과하지만 이란의 국가 운영 전통은 훨씬 오래됐다. 니잠 알 물크가 섬긴 셀주크 왕조 역시 튀르크계였지만 페르시아계 관료들은 새로운 지배층 아래에서도 행정과 재정, 지방통치를 맡았다. 이후에도 왕조와 정치·종교 질서가 거듭 바뀌는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관료제와 국가 운영 전통은 형태를 달리하며 재구성됐다.
이번 전쟁을 단순히 ‘47년 된 이란이슬람공화국 대 미국’의 대결로만 봐서는 이란의 내구성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은 주요 군사시설과 지휘부를 정밀 타격했지만, 그 충격을 흡수하고 새로운 지도부와 지휘체계를 세우는 국가의 역량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힘과 존엄을 갖추고 있는 지금” 전쟁을 끝내자고 말한 배경에도 반년 가까운 미국의 공세를 버텨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정치의 서]가 보여주는 것은 국가의 강인함만이 아니다. 니잠 알 물크가 국가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거듭 강조한 또 다른 조건은 백성의 삶이었다.
◆“백성의 삶 돌봐야”…1000년 전 경고
책에는 칼리프 우마르가 밤길에서 굶주린 여성과 아이들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은 눈앞의 사람이 우마르인 줄 모른 채 백성의 처지를 돌보지 않는 통치자를 원망한다. 이를 들은 우마르는 국고로 돌아가 식량을 등에 지고 다시 찾아간다. 수행자가 대신 짐을 들겠다고 하지만 우마르는 거절한다. 백성의 삶을 지키는 것은 통치자가 외면할 수 없는 책무라는 일화다.
니잠 알 물크가 소개한 마즈다크 운동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부와 권력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고 사회적 불만이 쌓이면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정치·사회운동이 확산됐다. 외부의 위협에 맞서 국가를 지키는 것만큼 내부의 민생과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경고로 읽힌다.
1979년 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제재를 견뎌낸 이란에도 이제 가장 큰 부담은 경제와 민생이다. 기존 제재와 고물가에 전쟁과 해상봉쇄까지 겹치면서 지난달 이란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66%에 달했고 식품 물가는 1년 전보다 128% 치솟았다. 산업과 무역도 타격을 받고 있다. 군사 공격으로 이란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 미국은 원유 수출과 대외 교역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예고하며 경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힘과 존엄을 갖추고 있는 지금” 종전을 언급한 것도 이런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이란은 최고지도자와 군 수뇌부를 잃는 타격에도 국가체제를 유지하며 미국의 공세를 견뎌냈다. 이제 전쟁을 계속해 국민의 부담을 키우기보다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출구를 찾겠다는 판단으로도 읽힌다.
1000년 전 니잠 알 물크가 [정치의 서]에서 강조한 국가의 힘도 군사력에만 있지 않았다. 관료와 군대가 질서를 지키고 백성의 삶을 돌볼 수 있어야 나라가 오래갈 수 있다고 봤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란 지도부와 군사시설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이슬람공화국 체제까지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미국의 제재와 이번 전쟁의 공습을 견뎌낸 이란에 남은 과제는 이제 경제 압박 속에서 국민의 삶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느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