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다면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소설가 조정래(83)가 평생 처음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썼다. 등단 56년.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사회의 모순을 파고들었던 작가가 이번에는 두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았다.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서리꽃’(해냄·전 2권)이다. 그는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장편소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조정래는 “왜 역사·사회 문제에 대한 소설만 쓰고 사랑소설은 쓰지 않느냐는 독자들의 질문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후배 작가 김훈과의 술자리 일화도 전했다. 김훈이 ‘태백산맥’을 두고 “소화와 정하섭 부분만 쏙 빼내면 ‘춘향전’을 능가하는 사랑 이야기, 연애소설이 된다”고 했다는 것. 조정래는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며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이 원했던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고 설명했다.
‘서리꽃’은 한 편의 시와 그림에서 시작된 사랑이 오랜 고난을 지나 완성되는 과정을 그린다. 대학 시절 시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이재이와 윤소인은 시화전을 계기로 서로에게 끌린다. 이재이의 시에 매료된 윤소인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변용한 시화를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술적 교감 속에서 사랑을 키운다.
그러나 조정래가 그린 사랑은 달콤한 연애담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슬픈 사랑 이야기가 현실과 밀착된 사회적 문제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것을 주제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천민자본주의의 무한한 탐욕이 인간의 삶에 엄청난 폐해를 남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야만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비인간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파괴되고,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재창조할 수 있는지를 쓰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에서 시와 그림, 그리고 반 고흐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중요한 장치다. 조정래는 작품을 쓰기 위해 2년 전 반 고흐의 자취를 따라 프랑스와 네덜란드로 취재 여행을 떠났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등을 답사했다. 취재 여행 동안 네 권 분량의 수첩에 메모와 그림을 남겼고, 그 기록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여행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사랑을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랑은 인간이 삶을 존속해나가는 데 희망 같은 것”이라며 “사랑이 없다면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번 작품을 내놓기까지 고비도 있었다. 그는 지난해 9월 복부대동맥 수술을 받았다. 배를 30㎝가량 가르는 큰 수술이었다. 이동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다시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열심히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작가는 “다행히 깨어나 소설을 쓰고 여러분을 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서리꽃’이 장편소설로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장편소설을 50년 가까이 쓰다 보니 단편을 쓰는 데 많이 소홀해졌는데, 다시 단편을 쓰고 수상록도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는 100m 달리기처럼 투쟁하듯 문학과 대적해왔는데, 앞으로는 좀 쉬엄쉬엄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정래는 ‘서리꽃’의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글을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 죽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그렇게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