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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남자 콤플렉스에 갇히다 [심층기획-닫힌 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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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그저 버틴다

‘가족 안전망’ 부재가 비극의 시작… 건강마저 잃으며 벼랑끝
고립·은둔 경험 중장년 남성 10인의 목소리

가정폭력·사별·이혼·실직 등 삶 변화가 계기
“창피함에 외출 꺼려” “벽 보고 3~4시간 보내”
강한 남성상 통념… 복지관 서비스조차 회피
“‘문고리 라면 한봉지’에 감동” 관계맺기 첫발도

가족과의 단절, 사별과 이혼, 그리고 갑작스러운 질병과 경제적 실패 등 갖가지 이유로 평범한 일상이 허물어진 자리에 남은 것은 깊은 고립과 외로움이었다.

 

스스로 세상과 격리한 채 골방에 갇혀 지내던 중장년 남성들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는 길은 어쩌면 사회 통념을 깨부수는 너무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고 주변을 맴돌던 도움의 손길을 잡는 순간, 관계맺기는 시작됐다.  

 

24일 전국 각지에서 고립∙은둔을 경험했거나 진행 중인 중장년 남성 10명을 만난 결과를 종합하면, 이들이 고립∙은둔에 빠진 과정을 단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건강악화∙가족 단절∙실패 경험∙성 고정관념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중장년 남성들이 고립에 빠지게 된 계기는 다양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의 관계가 부재한 경우 건강악화∙실업 등 삶의 변화가 생겼을 때 쉽게 혼자가 됐다.

 

60대 A씨는 두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라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망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20대 이후 식당 일을 하면서도 타인과의 소통 없이 고립된 삶을 이어왔고, 건강악화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세상과 단절을 택했다.

 

국가 폭력이나 사별 같은 삶의 비극이 고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60대 B씨는 청소년기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당한 폭행 후유증으로 청력과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1986년에 결혼했지만 5년이 안 돼 이혼했고, 30년 넘게 홀로 은둔 생활을 했다. 60대 C씨의 경우 사업을 하며 높은 소득을 얻고 결혼도 하며 평범한 삶을 살다가 2000년 아내와의 사별을 계기로 급격히 무너졌다. C씨는 “아내와 행복했던 기억이 있으니 외로움이 크게 다가왔다”며 “정신적 고통이 심했고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고립·은둔 기간 말할 수 없는 자괴감과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A씨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총 맞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했고, 가족 갈등과 사기 피해를 당해 고립에 빠진 50대 D씨도 “내가 죽고 나서 며칠 뒤 냄새가 나서 남에게 발견될까 봐 두려웠고 지금도 그렇다”며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기분”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고립을 장기화한 결정적 요인은 ‘건강 악화’였다. 병으로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관계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조차 쓸 수 없게 됐고,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 건강이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우울증으로 직장을 그만둔 뒤 노숙 생활까지 경험한 50대 E씨는 “집세를 내지 못해 노숙하게 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이제는 언덕길조차 걷기 힘들어 더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됐다”고 토로했다.

 

40대 F씨도 공황장애로 회사를 그만둔 뒤 악화된 건강이 항상 발목을 잡았다. 그는 “아픈 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지금 보면 공황장애·과민성 대장증후군인데 그때는 그런 진단이 제대로 없어서 20년 넘게 병을 앓았고 이제는 치료도 안 된다”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바로 망가져서 일도 못 하는데 사람들한테 어떻게 만나자고 하겠나”고 말했다.

 

◆“남자가 쪽팔리게”… ‘자존심의 벽’

 

‘남성’이라는 성별적 특징은 이들이 사회에 구조 요청을 보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단단한 벽으로 작용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강해야 한다’는 통념 탓에 어려움을 혼자서 삭인 것이다.

 

F씨는 “이 나이 먹고 도움을 요청하면 ‘다 큰 어른이 쪽팔리게 그러냐’며 무시하는 사회적 시선이 있다”며 “남자는 무조건 강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약해 보일까 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 고립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C씨도 “남자들은 자존심 때문에 창피해서 말을 못 한다”며 “창피함에 밖에 나가지도 않고 혼자 집에 있다 보면 벽만 보고 3~4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술을 마시고 고립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도움을 받는다는 동정의 시선이 싫어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할까 봐 도움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30년간 유리 제경사에서 일하다 퇴사 후 고립·은둔 상태에 빠진 60대 남성은 ‘가난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다’며 복지관 서비스를 거부했다. 친밀한 관계 역시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또 다른 60대 남성은 12살부터 일했던 섬유공장에서 결혼 후 갈비뼈 골절의 산업재해를 당하고, 가까운 지인이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자책감으로 우울증이 깊어졌다. 이후 보증을 잘못 서 전 재산을 날리고 신용불량자가 된 이후 가압류를 피해 다니다가 주민등록까지 말소됐다. 산속 빈집에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등 10년째 고립·은둔 상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배척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복지관 지원 등은 받지 않고 있다. 

 

고립·은둔으로 이어진 핵심적 요소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사회에서 나를 받아주겠느냐’며 비관하는 경우도 있다.

 

D씨는 새엄마에 의한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뒤 사기 피해를 입고 주거·생계급여를 받고 있다. 그는 “엄마도 나를 버렸는데 누가 나를 받아주겠냐”며 “당장 사람 만나서 쓸 돈도 없고 여력도 없다”고 했다. 이어 “먹을 게 없어서 복지관을 통해 반찬이나 일자리 등을 도움받고 있지만 사람들과 연결될 생각은 없다. 그냥 혼자서 죽을 것”이라며 관계 맺기를 거부했다.

 

F씨는 고립·은둔을 반복하고 있다.

 

여동생의 권유로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중장년 프로그램에 처음 참여했지만 꾸준히 가지 못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를 보는 눈들이 비난이 섞인 것 같아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며 “지금은 복지관에서 잘해줘서 괜찮아졌지만 그래도 사회 밖에 나오는 것과 고립·은둔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고리에 걸린 라면 한 봉지의 희망

 

단단했던 단절의 벽을 허문 것은 사회가 먼저 내민 손길이었다.

 

C씨는 복지관에서 문고리에 걸어둔 라면과 연락처가 담긴 봉투를 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C씨는 “전기료가 밀려서 보일러를 틀 수 없었다”며 “너무 추워서 이대로는 죽을 것 같길래 봉투를 통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C씨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다. 다른 중장년 남성들 사례처럼 ‘창피해서’, ‘가난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아서’ 처음 몇 번은 봉투를 보고도 거절했다. 추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도움의 손을 잡았지만 C씨는 “한 번 창피함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일도 하고 싶고 적극적으로 살고 싶었다”며 그 후 삶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C씨는 자신의 집 문고리에 걸려있던 봉투를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3년 전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빠르게 사회에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는 “복지사와 대화하는 게 전문적일 수는 있지만 같은 처지에 있었던 우리가 말하면 같은 편이니까 덜 민망하고 나오기 더 쉬울 것 같아 문고리에 봉투를 건다”며 “내가 받은 만큼 남에게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시원에 붙은 복지관 포스터를 보고 밖으로 나온 40대 G씨는 “사람들과 편하게 교류하면서 우울함이 줄고 내가 바뀌었다”고 미소 지었다. 그는 과거 공무원 시험 실패 후 단기 일자리를 이어오다 코로나19 때 고립에 빠졌다. 이후 송파구 삼전종합사회복지관의 중장년 1인가구 관계망 확장 지원 프로그램인 ‘참살이’에 참여했고, 자격증 취득 지원을 받아 전기기능사로 일하고 있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극심한 고립을 겪었던 B씨도 복지관 연락 덕분에 세상을 향해 걸어 나왔고, 현재는 서울시 ‘모두의 친구’ 치유활동가로 활동하며 또 다른 고립 가구를 방문하고 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정부의 고립·은둔 정책 및 일자리 사업이 중장년층으로 대폭 확대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씨는 “고립∙은둔 전에 컴퓨터 관련 일을 했던 만큼 새로운 지식을 배워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그런데도 중장년 대상 일자리는 대개 몸 쓰는 일이 많다. 난 건강이 안 돼서 그런 일은 못 하는데 지원 범위가 넓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F씨는 나이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원과 교육 기회가 대부분 만 34~39세 청년층에서 멈춰버려 마흔, 쉰이 넘은 중장년에게는 기회가 없다”며 “중장년이 선호하고 지속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G씨도 “요즘은 70대가 돼도 건강한데 사회에서 만든 나이라는 장벽이 굉장히 높다”며 “경제적인 도움 외에도 심리적으로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만큼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심리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전히 골방에 혼자 있을 또 다른 중장년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어려우면 문을 두드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