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영 대법원장 취임 직후인 1999년 10월 대법원이 고위 법관 인사를 단행했다. 사법연수원장과 법원행정처 차장을 비롯해 흔히 법원장급으로 불리는 판사 24명이 모두 교체됐다. 그 시절 언론은 “전국 법원장 전원이 바뀌는 것은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1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대법원은 “21세기를 맞아 사법부 조직의 쇄신을 위해서”라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김영일 부산지법원장은 새 보직을 받는 대신 대법원에 ‘무보직 법원장’으로 발령이 났다. 대법원장이 지명권을 갖는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재판관은 명문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5회)에 합격했다. 1970년 대구지법 판사로 임용된 이래 30년 가까이 법원에 재직하고 1999년 12월 헌재로 옮겼다. 2005년 3월 65세 정년을 맞아 임기(6년) 만료를 9개월여 앞두고 퇴임했다. 재임 중인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맡아 ‘국회의 탄핵소추를 인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탄핵 사건의 경우 소수의견 공표가 금지되나 재판관 9명 중 김영일·권성·이상경 3인이 탄핵에 찬성해 6(기각) 대 3(인용)으로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김 재판관은 노무현정부 시절 이른바 ‘신(新)행정수도’를 충남에 건설하기 위한 특별법에 위헌 의견을 밝히는 등 보수 색채가 뚜렷했다. 당시 재판관 7명은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는 것은 관습 헌법’이란 논리를 들어 헌법 위반으로 결정했다. 법률가인 노 대통령이 “관습 헌법은 처음 들어보는 이론”이란 반응을 보이자 진보 진영은 “헌법재판소가 아니고 헌법제작소(製作所)”라며 헌재를 맹비난했다. 실은 김 재판관도 ‘관습 헌법론’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가 위헌 의견을 낸 이유는 “수도 이전 같은 중대한 사안 결정은 헌법 72조에 규정된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6년 8월26일 12·12 군사 반란 등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공판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당시 중앙지법 형사30부 재판장이던 김 재판관이 판결문 요지를 낭독했다. 전 전 대통령에겐 사형, 노 전 대통령에겐 징역 22년 6개월이 각각 선고됐다. 검찰에 의해 ‘내란 수괴’로 지목된 전 전 대통령한테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이 흘러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2024년 8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 재판관이 무덤에서 혀를 끌끌 찰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