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슬러 빈야즈(Kistler Vineyards), 코스타 브라운(Kosta Browne), 윌리엄 셀럼(Williams Selyem). 명성 높은 이 컬트 와인 생산자들이 줄을 서서 포도를 사가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의 생산자가 하나 있습니다. 1880년대 골드러시 때부터 6대째 포도와 사과 등을 재배하는 농부 가문 더튼 랜치(Dutton Ranch)입니다. 컬트 와인 생산자를 포함해 더튼 랜치 포도를 사다 쓰는 와이너리는 무려 115개에 달합니다. 얼마나 포도 품질이 뛰어나기에 이처럼 유명 와이너리들이 앞 다퉈 더튼 랜치의 포도를 선택할까요.
◆컬트 와인 줄서는 이유
미국 캘리포니아 소노마 카운티 세바스토폴(Sebastopol)에 있는 더튼 랜치로 들어서자 많은 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레질런트 퓨처 미디어 투어(Resilient Future Media Tour)’에 참여한 일행을 맞이합니다. 그들의 재킷에는 ‘소노마 카운티 와인그로워스(Sonoma County Winegrowers)’가 또렷하게 새겨 있습니다. 이 단체는 포도 생산자들의 친환경 농법을 독려해 포도의 경제 가치를 높이고, 소중한 포도밭 자원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주기 위해 설립된 단체로 1800곳이 넘는 포도 재배 농가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카리사 크루스(Karissa Kruse) 소노마 카운티 와인그로워스 대표가 밝은 표정으로 차갑게 칠링된 사과 와인, 더튼 랜치 캔 사이더(cider)를 건넵니다. 한 모금 마시자 뜨거운 열기에 지친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갑니다. 상큼한 사과 향이 화사하게 터지는 그 첫 잔에서 이미 더튼 랜치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튼 랜치는 소노마 카운티에서 가장 크고 명망 높은 전문 포도 재배 가문입니다. 러시안 리버 밸리(Russian River Valley)의 세부 산지인 그린 밸리(Green Valley) 등에서 친환경·지속가능한 농법으로 직접 가꾸는 약 1200에이커(약 486ha) 규모의 포도밭에서 매년 수천 톤의 프리미엄 포도를 수확합니다. 이 중 대부분을 캘리포니아 전역 115곳이 넘는 와이너리에 판매합니다.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를 중심으로 한 더튼 랜치의 포도는 품질이 워낙 뛰어나 미국 최정상급 와이너리들이 앞다퉈 구매합니다. 나파밸리 컬트 와인을 대표하는 키슬러를 시작으로 듀몰(DuMOL), 파츠 앤 홀(Patz & Hall), 소노마-커트러(Sonoma-Cutrer)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와이너리는 더튼 랜치 포도의 가치를 인정해 와인 레이블에 공급처를 명시한 ‘빈야드 지정(Vineyard-Designated)’ 와인을 따로 내놓을 정도입니다. 가족이 직접 운영하는 더튼 에스테이트 와이너리(Dutton Estate Winery)와 더튼 골드필드(Dutton-Goldfield)는 전체 생산량 중 와이너리 기준에 맞는 극히 일부의 최상급 구획 포도만 골라 와인을 빚습니다.
◆골드러시에서 시작한 농부 가문
더튼 가문의 뿌리는 1860년대 골드러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황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더튼 가문은 정작 금은 찾지 못합니다. 대신 땅에서 답을 찾아 18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농업을 시작합니다. 지금의 ‘더튼 랜치’라는 이름이 붙은 건 1964년, 4세대 농부인 워렌 더튼(Warren Dutton)과 아내 게일 더튼(Gail Dutton)이 그레이튼(Graton) 외곽의 35에이커(약 14.16ha)짜리 농가를 에이커당 2000달러, 총 7만달러의 헐값에 사들이면서부터입니다.
워렌의 아들 스티브 더튼(Steve Dutton) 사장은 “지금 제가 몰고 다니는 픽업트럭 한 대 값이 그때 이 목장 전체보다 비쌌다”며 웃음을 짓습니다. 이어 워렌 더튼은 1967년 너무 춥고 척박해 프리미엄 와인 포도는 재배할 수 없다던 러시안리버 밸리(Russian River Valley) 서쪽 지역에 과감히 샤르도네를 심어 선구자로 이름을 남깁니다.
워렌이 세상을 떠난 뒤 가업은 스티브와 조 더튼(Joe Dutton) 형제에게 이어졌습니다. 두 형제는 포도밭을 관리하는 ‘더튼 랜치 코퍼레이션’을 함께 운영하는 동시에 각자의 와이너리도 세웠습니다. 스티브는 1998년 양조가 댄 골드필드(Dan Goldfield)와 함께 더튼-골드필드 와이너리(Dutton-Goldfield Winery)를 만듭니다. 조는 이보다 앞서 1994년 아내 트레이시(Tracy)와 함께 더튼 에스테이트 와이너리(Dutton Estate Winery)를 설립합니다. 현재는 스티브의 딸 조던 더튼(Jordan Dutton)이 고객 와이너리 관리를 맡고 조의 딸 카일리 더튼(Kylie Dutton)은 더튼 에스테이트의 양조를 맡으면서 5세대와 6세대까지 자연스럽게 가업에 합류했습니다.
◆자두, 포도, 사과 그리고 사이더
더튼 가문의 첫 작물은 사실 포도가 아니라 자두였습니다. 1880년대 초창기 더튼가는 동부까지 운송이 가능한 말린 자두의 가능성을 알아채고는 지역의 유명 원예가 루터 버뱅크(Luther Burbank)와 손잡고 자두 나무 2만 그루를 심어 200에이커(약 80.94ha) 규모의 농장을 일궜습니다. 하지만 1982~83년 무렵 시장이 사라지며 자두 농사는 막을 내렸고, 그 자리를 사과와 포도가 대신합니다.
1920년대 조 더튼의 외가인 코즐로스키 팜스(Kozlowski Farms) 부터 이어져 온 사과 농사는 1964년 더튼 랜치가 설립될 때부터 가문의 또 다른 핵심 축이었습니다. 현재 더튼 랜치는 포도밭 1200에이커 외에 캘리포니아 유기농 인증(CCOF)을 받은 사과 과수원 약 180에이커를 별도로 운영하며, 소노마 카운티의 전설적인 가업 품종인 그레이븐스타인(Gravenstein) 사과의 몇 안 남은 주요 생산자로 꼽힙니다. 해마다 5000t가량 수확하는 사과는 인근 만자나(Manzana) 프로덕츠 공장을 거쳐 유기농 애플 사이더 식초와 주스, 소스로 재탄생하며 세계적인 유기농 식초 브랜드 브래그스(Bragg’s)에도 연간 700만갤런 규모로 원료를 공급합니다.
조와 트레이시 더튼은 이 전통을 기리기 위해 유기농 과수원의 사과로 하드 사이더(hard cider) 생산도 시작했습니다. 그레이븐스타인과 당도 좋은 골든 딜리셔스(Golden Delicious)를 완벽한 비율로 블렌딩하는데, 비결은 저온 공정에 있습니다. 품종별로 각각 으깨고 즙을 낸 뒤 저온에서 침전시키고, 발효가 시작되기 전 주스 단계에서 두 품종을 섞어 풍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유도합니다. 캔에 담기기 직전까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저온 숙성해 갓 딴 사과를 베어 문 듯한 신선함과 새콤달콤한 밸런스를 살려냈습니다.
◆연어를 지키는 친환경 농법
더튼 랜치가 관리하는 포도밭은 전부 캘리포니아 지속 가능 포도재배 연합(CSWA)의 ‘지속 가능 인증’을 받았고, 친환경 어업 및 수질 보호 인증인 ‘피시 프렌들리 파밍(Fish Friendly Farming)’도 받았습니다. 목장을 가로지르는 그린밸리 크릭(Green Valley Creek)과 퍼링턴 크릭(Purrington Creek)이 만나는 합류 지점이 이 농장 안에 있는 만큼, 흙의 침식을 막고 연어가 살아가는 물길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밭을 가꾸는 일이 이들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습니다.
화학 비료 대신 커버 크롭을 심어 토양의 영양분을 지키고, 인위적인 관개를 최소화한 채 빗물과 흙의 힘만으로 포도를 키우는 드라이 파밍도 적극 활용합니다. 최근엔 화학 자재 사용을 줄이는 스마트 분무 장비를 도입하고, 사무실 옆에는 세계 최초의 포도재배 특화 농업 로봇 인큐베이터를 유치해 스타트업들과 함께 기술적 해법도 실험하고 있습니다. 와인 시장이 침체된 요즘 노후한 1975년·1980년·1991년 식재 포도밭을 뽑아내 땅을 쉬게 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재식재를 준비하는 것도 이들만의 지속가능한 농법입니다.
◆테루아를 한 잔에 그대로 담다
더튼 랜치의 양조 철학은 간단합니다. 포도를 인위적으로 가공하기보다 러시안리버 밸리와 그린밸리의 서늘한 기후, 그리고 이 지역 특유의 사질 양토인 ‘골드리지(Goldridge)’의 개성을 와인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입니다. 오후가 되면 페탈루마 윈드 갭(Petaluma Wind Gap)이나 러시안리버 쪽에서 낮은 지대를 타고 안개가 스며들어 골짜기를 서늘하게 식히는데, 이 냉량한 기후 덕분에 피노 누아와 부르고뉴 스타일의 샤르도네가 유독 좋은 품질로 만들어집니다. 기계 수확 대신 100% 손 수확을 고집하고, 프렌치 오크통으로 과하지 않은 은은한 오크 풍미와 실크처럼 부드러운 질감을 이끌어내는 전통적인 방식을 지킵니다. 무거움 없는 풍부함, 산도와 밸런스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와인이 탄생하는 배경입니다.
▶더튼 에스테이트 카일리 퀴베 소비뇽 블랑 더튼 랜치(Dutton Estate Kylie's Cuvée Sauvignon Blanc, Dutton Ranch)
시트러스 블라썸과 화이트 피치, 만다린 오렌지의 산뜻한 향이 먼저 코를 스치고, 이어서 허니듀 멜론과 탠저린, 키라임의 다채로운 과실 향이 은은한 달콤한 오크 뉘앙스와 겹겹이 쌓입니다. 가르데니아(치자나무꽃)의 화사한 꽃향기와 파파야, 젖은 돌의 미네랄 뉘앙스도 함께 감돕니다. 입에 머금으면 복숭아와 카모마일이 가득 차는 듯한 농밀하고 감미로운 맛이 느껴집니다. 소비뇽 블랑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산미가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우아하고 부드러운 텍스처가 훌륭한 밸런스를 이룹니다. 목 넘김 후에는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루비 레드 자몽과 메이어 레몬 제스트의 풍미가 길게 이어집니다.
신선한 생선회나 스시 롤, 레몬과 허브를 곁들인 조개·굴 요리, 시트러스 살사를 얹어 구운 생선 요리와 잘 어울리고, 특유의 산미가 살아 있어 태국 요리 같은 아시안 퀴진과도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소비뇽 블랑 100%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와 콘크리트 에그, 새 오크 및 뉴트럴 프렌치 오크 배럴을 함께 사용해 발효하고 숙성합니다. 조 더튼의 둘째딸 카일리 더튼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와인입니다. 카일리는 현재 와이너리의 수석 부사장 겸 어시스턴트 와인메이커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더튼 에스테이트 카르멘 이사벨라 피노 누아(Dutton Estate Karmen Isabella Pinot Noir Dutton Ranch)
짙고 잘 익은 붉은 과일 향이 중심을 잡은 가운데 체리 콜라, 프랑스 론 등에서 가리그(garrigue)라 불리는 야생 허브, 백후추 향이 조화롭게 피어오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제비꽃 같은 우아한 꽃향기와 구운 오크, 은은한 향신료 뉘앙스가 겹겹이 스며듭니다. 블랙베리와 다크 체리, 말린 허브, 비터 초콜릿 풍미가 진하게 전해지는 미디엄 바디 와인으로, 타닌이 촘촘하게 녹아들었고 생생하고 짜릿한 산미가 매 모금 입안을 리프레시해줍니다. 이국적인 스파이스와 함께 부드럽고 풍성한 피니시로 마무리됩니다.
오리나 거위, 야생 조류 같은 가금류 요리와 잘 어울리고 토마토 콩피를 곁들인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나 이탈리안 파스타 같은 일상 요리와도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조 더튼의 아내 트레이시의 모친 카르멘과 조 더튼의 셋째딸 카르멘의 묶어서 와인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더튼 골드필드 더튼 랜치-워커 힐 빈야드 샤르도네(Dutton-Goldfield Dutton Ranch-Walker Hill Vineyard Chardonnay)
미국식 디저트 향긋한 복숭아 코블러와 토스트한 머랭, 구운 아몬드, 부싯돌 향이 관능적으로 어우러지고 토스트 스파이스와 젖은 돌, 밀랍, 노란 꽃, 신선한 황금 사과 향까지 미묘하게 교차합니다. 미디엄에서 풀 바디 사이의 풍만한 질감과 실키하고 둥근 텍스처가 인상적이며, 진한 과실 풍미와 활기찬 산미가 아주 자연스러운 균형을 이룹니다. 삼킨 뒤에는 부싯돌 결이 느껴지는 미네랄 뉘앙스가 산뜻하고 길게 남습니다.
버터나 크림을 가미한 요리와 특히 잘 어울립니다. 구운 프로슈토를 곁들인 크리미한 땅콩호박 리소토, 버터 레몬 소스를 끼얹은 광어 요리나 토스카나식으로 푹 고아낸 닭고기 요리, 짭짤한 하드 치즈와도 궁합이 좋습니다.
샤르도네 100%로, 러시안리버 밸리의 그린밸리 중심부 퍼링턴 크릭 인근 고도 500피트에 자리한 워커 힐(Walker Hill)의 포도만 사용합니다. 1980년대 초반 심어진 올드 바인 웬테(Wente) 클론 샤르도네로, 100% 배럴 발효와 젖산 발효를 거칩니다. 프렌치 오크(새 오크 50%)에서 18개월간 숙성하며, 정기적으로 마개를 열어 효모 찌꺼기를 저어주는 리 스터링(lees stirring·바토나주 bâtonnage)을 병행해 크리미하고 묵직한 질감과 복합미를 더하고 숙성 잠재력을 끌어올립니다.
▶더튼 골드필드 로제 오브 피노 누아 노스 코스트(Dutton-Goldfield Rosé of Pinot Noir North Coast)
붉은 장미수향과 귤껍질의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먼저 피어오릅니다. 이어 구아바와 신선한 딸기, 잘 익은 천도복숭아 향이 화사하게 번지며 봄날 정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입에 머금으면 가볍고 경쾌한 질감과 생기 넘치는 산미가 입안을 산뜻하게 깨웁니다.
가벼운 산도와 산뜻한 스타일 덕분에 음식과의 궁합이 무척 넓습니다. 담백하게 구운 치킨이나 칠면조 요리, 부드럽게 구워낸 연어와 신선한 해산물 샐러드, 짭짤한 샤퀴테리나 부드러운 연성 치즈, 야외 피크닉용 샌드위치와 곁들이면 좋습니다.
피노 누아 100%로 멘도시노 카운티와 러시안리버 밸리 등 캘리포니아 노스 코스트(North Coast) 일대의 밭을 블렌딩합니다. 오크 숙성 없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만 양조해 포도 본연의 신선함을 그대로 살립니다.
▶더튼 골드필드 더튼 랜치-모렐리 레인 빈야드 진판델(Dutton-Goldfield Dutton Ranch-Morelli Lane Vineyard Zinfandel)
잘 익은 딸기와 산딸기 향이 강렬하게 코를 자극한 뒤 오렌지 제스트, 콜라, 사사프라스 같은 이국적인 뉘앙스가 화사하게 따라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나몬과 정향의 브라운 베이킹 스파이스, 달콤한 과일 가죽 향까지 겹겹이 쌓입니다. 입안 가득 붉은 과일의 풍미가 쏟아지고 구조감이 단단하며, 씹히는 듯한 타닌이 고급스러운 초콜릿 느낌을 남깁니다. 진판델 특유의 강인함과 러시안리버 밸리의 우아함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뤄 삼킨 뒤에도 긴 여운이 이어집니다.
양념이 강한 육류 요리와 특히 잘 맞습니다. 허브를 곁들여 구운 양고기 스테이크, 풍미 진한 바비큐 폭립, 소스가 풍부한 소고기 스튜와 짝지으면 좋고, 짭조름한 감칠맛이 도는 숙성 고다 치즈와도 궁합이 훌륭합니다.
진판델 100%이며 러시안리버 밸리 서쪽 능선 꼭대기에 자리한 단 1.8에이커짜리 초소형 밭 모렐리 레인(Morelli Lane) 포도로 만듭니다. 1900년대 초반 심어진 고목이 인위적인 관개 없이 드라이 파밍으로 자라, 응축된 향이 특징입니다.<기후변화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 ⑭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