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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의역사산책] 조선의 소와 아이들을 그린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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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소 모습·가족의 사랑 통해 민족혼 담아내
한국 근현대 고통, 예술로 승화한 삶 성찰해야

1956년 9월13일 모 신문에서 화가 이중섭이 숙환 위장병으로 9월6일 서대문 소재 적십자병원에서 별세했다는 부고 기사를 실으면서 “새롭게 개성적인 화법으로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덧붙였다. 향년 41세였다. 다만 그의 별세 소식이 왜 늦게서야 보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망 후 연고자가 없는 것으로 처리되어 사흘간 영안실에 방치되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또 이중섭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간경변증(간장병) 및 간염 등의 간 질환과 극심한 영양실조였다.

김태웅 서울대 명예교수·역사교육
김태웅 서울대 명예교수·역사교육

특히 가족에 대한 극심한 그리움과 전시회 실패로 인한 좌절감으로 조현병(정신분열증)과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알려졌다. 이어서 9월15일 모 일간지에는 6·25전쟁 피란 시절과 1950년대 명동 등지에서 깊은 교분을 나눈 시인 김종문이 쓴 추도시가 게재되었다.

필자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접하게 된 계기는 1970년대 후반 고등학생 시절 어느 여대생이 우리 집 점방에 놓고 간 고은의 ‘이중섭 평전’이었다. 중학생 시절 미술교사의 숙제로 친구와 함께 초현실주의파 화가 샤갈과 달리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뒤질 때만 해도 한국 화가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필자가 평전을 읽고는 그가 그린 조선의 소라든가 가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제주, 부산 피란생활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가족에 대한 진한 사랑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1979년 말 여러 일간지에 고은(고은태)이 도시산업선교회 배후 조종자라고 대문짝만하게 대서특필되어 잠시 충격에 빠졌다. 당시 정부는 동일방직 노동자 등 다수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힘을 기울였던 도시산업선교회를 용공단체로 몰아 탄압하던 터였다. 그러나 그러한 보도가 이중섭의 은지화(銀紙畵, 담뱃갑의 은색 포장지 그림)에서 전해오는 가족에 대한 불타는 사랑, 절절한 그리움과 함께 지독한 가난을 가리지 못했다.

필자의 이런 감정은 1980년대에는 한낱 감상(感傷)이오 사치로 비칠까 보아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한국 사회가 신군부의 군홧발 아래서 숨죽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민중판화 작가 오윤의 작품에 눈길이 가곤 했다.

그럼에도 이중섭의 그림에서 조선의 힘찬 소를 발견하였고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곤 하였다. 이후 제주도 서귀포를 방문하여 그의 가족이 오손도손 단란하게 살았던 1.4평(약 4.6㎡)짜리 곁방을 엿보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수년 전에 고교 동창들과 함께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방문하는 가운데 그의 초라한 무덤을 발견하고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일제하 꺼져가는 민족혼을, 조선의 소를 통해 되살렸고, 전쟁의 아픔을 절절히 담은 그의 예술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찜찜한 마음 때문에 올해 다시 한번 그곳을 탐방하여 이중섭 묘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가족의 얼굴이 새겨진 묘비가 건립되었음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누군가의 청원이든 지자체의 문화 방침이 바뀌었든 어쨌든 이런 변화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한국 근현대의 고통을 고스란히 품고 예술로 승화한 작가에 대한 기억은 결코 과거 문화의 평가에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 한국 예술이 어디에서 왔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는가를 다시금 성찰하는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김태웅 서울대 명예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