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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담긴 기억과 시간… 하나하나 떠내 삶을 되돌아 보다

국립현대미술관 ‘집의 작가’ 서도호 개인전

자신이 살던 한옥·뉴욕의 방·복도 등
반투명 천으로 실물 크기 재현해 주목

30여 년간 이어온 작업의 궤적 압축
설치·조각·드로잉 등 500여점 전시

수묵화 거장인 부친이 지은 성북동집
1대 1로 떠낸 ‘러빙/러빙 서울 집’ 눈길

얇은 종이로 떠낸 한옥 한 채가 전시장 안에 서 있다. 벽과 문, 창호와 기둥은 그대로지만 나무와 흙, 그리고 사람이 살던 육중한 물성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살갗처럼 얇은 표면뿐이다. 서도호(64)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성북동 집을 1대1 크기로 떠낸 ‘러빙/러빙: 서울 집’이다. 서도호에게 이곳은 단순한 옛집이 아니다. 그가 공간을 감각하고 기억하는 법을 익힌 곳이자, 훗날 세계 곳곳의 집을 천과 종이에 옮겨온 작업 세계의 한 출발점이다.

이 집은 한국 현대 수묵화의 거장인 아버지 서세옥(1929~2020)이 한옥이 빠르게 헐려 나가던 1970년대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전통 건축 방식을 살려 지었다. 철거된 한옥의 목재와 창호, 철물 등을 모아 5년 넘게 집을 짓는 과정을 어린 서도호는 곁에서 지켜봤다. 그는 이 경험을 “부모님이 제게 주신 큰 선물”이라며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건축적·공간적으로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러빙/러빙: 서울 집’(2013·2022). 벽, 문, 창호, 기둥 등 건축 요소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안료를 문질러 표면의 형태와 질감을 그대로 채집했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드로잉처럼 다루는 방식으로 확장하며, 실제 건축물의 표면을 평면으로 번역한 작품이다.
‘러빙/러빙: 서울 집’(2013·2022). 벽, 문, 창호, 기둥 등 건축 요소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안료를 문질러 표면의 형태와 질감을 그대로 채집했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드로잉처럼 다루는 방식으로 확장하며, 실제 건축물의 표면을 평면으로 번역한 작품이다.

수십 년 뒤 그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다. 벽과 문, 창호와 기둥에 닥지를 밀착시키고 거의 1년에 걸쳐 손으로 흑연을 문질렀다. 나뭇결과 문살, 표면의 미세한 굴곡까지 종이에 떠낸 뒤 이를 한 장 한 장 떼어내 구조물 위에 다시 세웠다. 작업하는 동안 종이는 비를 맞고 녹이 배고 얼룩이 졌다. 집에 켜켜이 쌓인 시간은 종이 위에 옮겨앉았다. ‘문지르다(rubbing)’와 ‘사랑하다(loving)’를 포갠 작품 제목처럼, 기억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천천히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그 긴 작업을 거치고서야 서도호는 “비로소 이 집을 떠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3년 시작해 2022년 완성된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 ‘서도호’에서 처음 선보인다.

지난달 27일 개막한 ‘서도호’전은 작가가 지난 30여년간 이어온 작업의 궤적을 압축해 보여준다. 유년기 작업부터 최근작까지 설치·조각·영상·드로잉과 아카이브 등 500여점을 3·4·5전시실과 복도, MMCA스튜디오에 펼쳤다.

서도호는 흔히 ‘집의 작가’로 불린다. 자신이 살았던 한옥과 뉴욕의 방, 복도와 계단을 반투명 천으로 실물 크기 그대로 옮기는 작업으로 이름을 각인했다. 하지만 그에게 ‘집’은 한곳에 붙박인 건축물이 아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시절의 집들이 한 공간 안에 겹쳐지기도 한다. 기억을 품은 채 함께 이동하며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속하는가’를 묻게 하는 공간이다.

그 뿌리를 보여주는 곳이 전시장 밖 긴 복도에 마련된 ‘시드 뱅크(Seed Bank)’다. 어린 시절 작업부터 서울대 동양화과 시절, 미국 유학 초기의 실험까지 그동안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과 자료를 모았다. 개막 전날 미술관에서 만난 서도호는 오래전 작업들을 다시 꺼내놓은 심정을 “옷을 홀딱 벗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서도 “내가 30년 동안 해온 작품들의 시작, 그 씨앗들이 거기에 다 있었다”고 말했다.

그 씨앗이 본격적인 ‘움직이는 집’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994~1995년작 ‘516호/516호-I/516호-II’다. 미국 유학 시절 사용하던 방을 실측해 벽과 문, 배관까지 실제 크기로 옥양목에 옮긴 첫 천 작업이다. 이는 집이 고정된 장소가 아닌 기억과 관계, 이동이 교차하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바뀌는 출발점이었다.

서도호의 집 작업에서 기억을 붙드는 것은 집의 외형보다 그 안에서 매일 손이 닿았던 작은 것들이다. 집을 기억한다는 것은 건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온 몸의 움직임을 되짚는 일에 가깝다. 그는 전등 스위치와 수도꼭지, 경첩처럼 매일 손이 닿고 몸이 익숙해진 작은 것들을 같은 크기로 떠내고 재현해왔다. 2024년작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은 이 같은 기억의 방식을 한데 겹쳐 놓은 ‘건축적 자서전’이다. 현재 거주하는 런던 집 내부에 이전 집들의 흔적을 포개 서로 다른 도시와 시간을 한 공간에 중첩했다

‘둥지/들’(2024). 서도호가 서울, 뉴욕, 베를린, 런던 등 여러 도시에서 거주했던 집의 복도와 문, 방과 같은 전이 공간의 구조를 하나의 연속된 건축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작가·리만머핀·빅토리아 미로 제공
‘둥지/들’(2024). 서도호가 서울, 뉴욕, 베를린, 런던 등 여러 도시에서 거주했던 집의 복도와 문, 방과 같은 전이 공간의 구조를 하나의 연속된 건축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작가·리만머핀·빅토리아 미로 제공

그의 집 작업에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가족이었다. 독신이던 그의 초기 작업이 ‘빈 방과 나’의 관계에서 출발했다면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긴 뒤에는 집은 더 이상 자신과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그 변화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신작 ‘사랑의 기억’(2026)에서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다. 어머니가 전시 개막식에 입으라며 사줬던 오래된 코트 안쪽에 가족들의 옷에서 떼어낸 주머니를 달고, 그 안에 가족과 관련된 작은 사물들을 넣었다. 한 사람의 옷 안에 어머니와 자녀 등 여러 세대의 흔적을 포개 넣은 것이다. 서도호에게 옷은 몸을 감싸는 “제일 작고 은밀한, 이동 가능한 공간”이다. 말하자면 집의 가장 작은 단위다. 몸 하나를 감싸던 이 작은 공간은 여러 세대의 기억과 시간을 품는 장소가 된 셈이다.

집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물리적인 주거 공간 바깥으로도 뻗어간다. ‘Who Am We?’(2020)에서는 수만 명의 작은 인물 사진이 벽면을 빼곡히 채운다.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만, 한발 물러서면 하나의 집단적 풍경으로만 보일 뿐이다. 서도호에게 집은 어느 한 채의 건물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이처럼 한옥에서 출발한 집에 대한 사유는 여러 도시와 가족의 기억을 거쳐 공동체와 사회의 문제로까지 확장됐다. 이 같은 작업으로 서도호는 일찍부터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작품 규모가 큰 데다 설치가 쉽지 않아 국내에서 자신의 작업 세계를 한자리에서 충분히 보여줄 기회가 많지 않았던 서도호에게 이번 전시는 각별한 자리다. 자연스럽게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이 따라붙었지만, 그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불교의 ‘회향(廻向)’이라는 말이 더 가깝다고 했다. 해외 전시를 할 때마다 한국에서도 작품을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미안함’이 쌓였다는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관객과 나눈다는 의미로 이번 전시를 설명했다. 그가 꺼내놓은 것은 자신의 집이지만, 그 앞에서 관객이 떠올리는 것은 저마다의 집과 삶이다. “관객분들이 제 작품에서 본인들의 인생을 생각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서도호의 집을 보는데, 왜 내 집이 생각나지, 왜 내 인생이 생각나지?’ 하고요.” 전시는 내년 2월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