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왕과 정승은 바뀌어도 그들은 남았다 [조선생활실록(實LOG)25]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관청의 진짜 실세 경아전
경아전 하려 전략 짜기도
신임 관료를 나그네 취급
상전의 당색에 맞춰 반목
권세 영합하며 이권 추구

숨은 실세였던 ‘실무의 귀재들’

 

조선 임금은 스물일곱 번, 그 아래 정승과 판서는 셀 수 없이 바뀌었다. 이 화려한 흥망 뒤편에서 국가 행정의 톱니바퀴를 돌렸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중앙 관청의 행정 실무자, ‘경아전(京衙前)’이다. 경아전은 이른바 ‘알아주는 집안’의 겸인(청지기) 출신이었다. 이들은 때로는 상관의 명보다 자신이 속한 ‘알아주는 집안’을 더 우선시하며 실세로 군림했다. 경아전은 왕, 정승, 판서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실세를 어떻게 쥐었을까?

명현화상에 수록된 홍봉한의 초상화이다. 홍방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명현화상에 수록된 홍봉한의 초상화이다. 홍방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첨지까지 오른 노동지의 승부수

 

조선 후기, 이권이 있는 중앙 관청 서리직은 권세가의 겸인들이 독점했다. 노동지의 일화는 중앙 관청 서리직을 향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활 솜씨는 좋았으나 합격 운이 없던 노동지는 당시 실권자 홍봉한 집안의 겸인이 되려고 꾀를 낸다. 그는 일부러 통금 시간을 어기고 순라군과 난투극을 벌여 다섯 명이나 때려눕힌다. 어영대장을 겸하던 홍봉한 앞에 끌려간 노동지는 나으리를 뵙고자 일부러 일을 벌였다며 담력과 용력을 과시한다. 노동지가 마음에 들었던 홍봉한은 그를 전령으로 쓰게 된다. 이후 노동지는 첨사 지위까지 올라 평생 먹고살 재산을 모은다. 재상가를 뒷배로 삼는 게 곧 ‘출세길’이었던 셈이다.

병마사가 명령을 전하는 신표로, 앞쪽에 개인 서명(수결)이 있고 뒤쪽에 한자로 전령이라고 쓰여 있다. 전령은 이 신표를 지니고 명령을 전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병마사가 명령을 전하는 신표로, 앞쪽에 개인 서명(수결)이 있고 뒤쪽에 한자로 전령이라고 쓰여 있다. 전령은 이 신표를 지니고 명령을 전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나으리는 나그네일 뿐!”

 

중앙 관청의 신임 관료는 대개 몇 달 만에 자리를 옮기는 ‘나그네’ 신세였다. 반면, 아전은 해당 관청에서 평생을 보내며 모든 업무와 이권 구조를 장악했다.

 

실학자 황윤석이 전생서 주부로 부임했을 때 일화다. 황윤석이 문효세자 장례를 위해 흰 신발과 검은 허리띠를 가져오라고 하자, 아전 윤재신은 “돈이 모자란다”, “사이즈가 안 맞는다” 등 핑계를 대며 사흘이나 게을리 보낸다. 황윤석은 태만한 아전 윤재신을 가두고 볼기를 쳤지만, 정작 파직시키지는 못한다. 윤재신이 홍양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황윤석은 일기에 ‘이들을 내쳐봐야 결국 또 다른 당상가의 종이 그 자리를 꿰찰 뿐’이라며 한탄할 따름이었다. 법도보다 ‘뒷배’와 ‘인맥’이 더 중요했던 조선 행정의 민낯이다.

총어사의 명령이을 증명하는 철제 전명패이다. 전령은 이 패를 지니고 명령을 전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총어사의 명령이을 증명하는 철제 전명패이다. 전령은 이 패를 지니고 명령을 전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전의 적은 나의 적

 

파벌은 고위직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전도 자신이 속한 가문의 당색에 따라 반목했다. 전생서에서 일하던 제조 김이소와 직장 정동철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동철은 “우리 형이 상의원에서 일할 때 김 대감이 인사조차 안 받았다”고 상관 김이소에 대한 원한을 토로했다. 김이소는 전생서에 부임한 뒤로도 정동철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정동철은 “제조가 나를 피하는 것”이라며 반목했다. 파벌이 어찌나 공고했는지, 관청 내 서리 대다수가 특정 당파에 매인 사례도 많았다. 신임 관료가 “이곳은 온통 남인과 소론의 하인뿐”이라며 당황할 정도였다.

조선 후기 이재 황윤석이 남긴 방대한 분량의 저작으로, 과학 지식은 물론 당시 생활상을 자세히 기록했다. 고창군청
조선 후기 이재 황윤석이 남긴 방대한 분량의 저작으로, 과학 지식은 물론 당시 생활상을 자세히 기록했다. 고창군청

갈아타기의 달인 임세웅

 

경아전의 생존력은 경이로웠다. 생존왕으로 임세웅을 꼽을 수 있다. 임세웅은 왕실의 종친 해운군 이연의 겸인으로, 종부시 서리가 된다. 그는 자신을 공신의 후예로 위조해 특권을 누리려다가 황윤석에게 적발된다. 매를 맞은 임세웅은 이연에게 고자질해 사적 보복을 시도하다가 영조에게까지 알려져 처벌받는다. 하지만 임세웅은 다시 종부시에 들어간다. 정존겸 집안의 겸인으로 갈아타며 새로운 ‘뒷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임새웅은 횡령죄로 쫓겨났지만, 또다시 사복시 서리로 복귀한다. 법은 처벌했지만, 권력의 그물은 그를 건져 자신들의 세를 불리는 데 썼던 것이다.

동여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대종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만든 채색지도이다. 전생서는 지도 중심의 한양 도성 아래 남묘 우하단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동여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대종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만든 채색지도이다. 전생서는 지도 중심의 한양 도성 아래 남묘 우하단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원칙보다 효율을 앞세운 결과

 

어째서 경아전이 특정 집안이나 개인의 인맥으로 채워졌을까? 원래 경아전은 이조에서 3년마다 일괄적으로 선발했다. 그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큰 인력 손실을 겪었다. 기초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조정은 관청 책임자에게 인사권을 주고 수시로 채용하게 조처했다. 인력 수급이 쉽지 않았으므로, 자기 집이나 같은 당색 집안의 일 잘하는 겸인(청지기)을 들였다. 임시방편이었으나, 공적 조직은 사적 인맥으로 운용되기 시작했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인맥은 공적 조직을 잠식해 갔다.

 

예나 지금이나

 

‘장’은 바뀌지만, 곁에서 문서를 만지고 인맥을 엮는 손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이 사실을 우리는 여전히 목격한다. 정동철이 상관과 반복한 것도, 윤재신의 태만한 업무 태도도, 임세웅의 오뚜기 생존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2)

 

노혜경 호서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