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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사람 잡아먹는 양, 사람을 내쫓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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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아파트가 마주 서 있다. 한 채는 16억원, 다른 한 채는 3억4000만원. 평형은 엇비슷하다. 무엇이 이 다섯 배의 격차를 갈랐을까. 답은 땅에 있다. 뒤의 집은 땅값을 뺀 건물만의 값이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집값을 둘러싼 오랜 논쟁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 우리는 집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늘 땅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의 집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값을 잡으라고 만든 공공의 손이 거꾸로 값을 밀어 올리는 탓이다. 오백 년 전 영국을 떠올려 본다. 양털값이 치솟자 지주들은 농토에 울타리를 둘러 농민을 내쫓고 그 자리에 양을 풀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를 두고, 온순하던 양이 이제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꼬집었다. 땅이 소수의 이익 수단이 되는 순간 다수는 살 자리를 잃는다는 경고였다. 지금 우리의 방식도 그 결에서 멀지 않다. 공공이 개발한 땅을 민간에 넘기고, 민간이 지은 값비싼 집을 공공이 다시 사들인다. 한 시민단체 분석으로는, 최근 몇 해 공공이 이렇게 사들인 집이 9만호를 넘고 들인 돈이 21조원에 이른다. 그 대부분이 값비싼 신축이었다. 집값을 낮추라고 세운 기관이 도리어 시세를 떠받치는 큰손이 된 셈이다.

이다영 올바른정책연구소 대표
이다영 올바른정책연구소 대표

다른 길이 있다. 땅은 공공이 갖고 건물만 파는 방식이다. 이른바 토지임대부, 반값 아파트다. 루소는 일찍이 그 뿌리를 건드렸다. 어떤 땅에 처음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것”이라 말한 자 그리고 그 말을 믿어 준 순박한 사람들이 불평등의 시작이었다고 그는 적었다. 땅은 본래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 열매는 모두의 것이라는 물음이 거기 담겨 있었다. 동양에서도 맹자가 땅을 우물 정(井) 자로 나눠 함께 부치는 정전법을 이상으로 삼았다. 땅을 사사로이 가두지 않으면 집은 얼마든지 싸질 수 있다. 올봄 서울 마곡이 그 원리를 증명했다. 스무 평대 한 채가 3억4000만원, 첫날 경쟁률은 73대 1이었다. 지을 땅이 없다는 말도 핑계에 가깝다. 지은 지 오래된 낡은 공공임대를 헐고 용적률을 크게 높여 다시 지으면, 같은 땅에서 몇 배의 집이 나온다.

관건은 투명함이다. 반값을 말하려면 원가부터 열어야 한다. 그런데 LH는 원가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도 번번이 항소하며 문을 닫아걸어 왔다. 서울과 경기의 공사가 이미 공개로 돌아선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무엇을 얼마에 지어 얼마에 파는지 시민이 두 눈으로 볼 수 있어야, 거품이 어디에 끼었는지도 드러난다. 한쪽에서는 팔리지 않는 새 아파트가 지방에 쌓이는데, 다른 쪽에서는 수도권 집값이 끓어오른다. 한 나라의 집이 이토록 다른 두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이 아니라 정책이 비틀려 있다는 증거다.

집은 상품이기 전에 삶의 자리다. 땅을 공공이 지키고, 원가를 낱낱이 밝히고, 물량을 과감히 늘리는 일. 그 어느 것도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정작 부족한 것은 기술도 예산도 아니라, 그 도구를 제대로 쓰겠다는 결심 하나다. 집을 끝없이 불어나는 자산으로 남겨 둘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깃들어 사는 자리로 되돌릴 것인가. 오늘 우리가 어느 쪽을 고르느냐가, 다음 세대가 어디에 주소를 두고 살아갈지를 조용히 결정한다.

 

이다영 올바른정책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