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유럽에서 가장 널리 읽힌 작가 중 한 명인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의 벨 에포크부터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나치의 부상, 망명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목격한 유럽의 몰락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릴케와 로댕, 프로이트, 로맹 롤랑 등 당대 문화예술계 거장들과의 교류를 통해 20세기 초 유럽 지성사의 풍경도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한 개인의 자서전을 넘어 평화와 진보를 믿었던 한 문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증언한 ‘유럽 문명의 부고’다.
슈테판 츠바이크/이노은 옮김/다산초당/3만3000원
합스부르크 제국 말기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계 시민 가정에서 태어난 젊은이에게 미래는 약속된 것이었다. 과학과 교육은 발전하고 인간은 점점 더 합리적으로 변하며 문명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츠바이크는 작품에서뿐 아니라 삶에서도 국경을 넘나든 ‘유럽인’이었다. 당대 유럽 문화계의 거물들과 교유하며 언어와 국적이 달라도 문학과 음악, 예술을 통해 하나의 유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기억하는 세기말 빈은 특히 매혹적이다. 예술가와 배우, 작곡가가 오늘날의 대중 스타처럼 숭배받았고 젊은이들은 새 시집과 공연, 음악회에 열광했다. 파리의 카페와 빈의 극장, 예술가들의 작업실 이야기가 생생하다. 문화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도 츠바이크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살아 있는 사람들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츠바이크가 보여주는 것은 사라진 황금시대의 풍경만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과 두 차례 세계대전, 히틀러의 집권과 나치즘의 확산이라는 익숙한 세계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려준다.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사람들은 무엇을 믿었는지, 평화롭다고 여겼던 세계가 무너질 때 무엇을 느꼈는지를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했다.
그 자신도 몰락하는 유럽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대계 작가였던 그의 책은 나치 독일에서 금서가 되고 불태워졌다.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까지 흘러간 츠바이크는 페트로폴리스에 정착했다. 유럽이 다시 전쟁의 참화에 빠져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이 책을 완성한 후 두 번째 아내 로테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음악과 미술, 문학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전쟁에 열광하게 됐을까. 최고의 교육과 교양을 자랑하던 유럽에서 어떻게 파시즘과 홀로코스트가 태어났을까. 문화와 교육은 왜 정치적 광기를 막지 못했으며 문명은 왜 이토록 쉽게 후퇴하는가. 전쟁과 난민과 군비 경쟁이 국제사회 일상어가 된 지금 우리에게 다시 던져진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