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소설의 특징은 이야기의 상황이 명확하다는 데도 있다. 인물에게 필요하고 저절로 갈등을 끌어낼 수 있는 상황. 좋은 SF 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가 이야기 안에 심어 놓은 질문에 대해 숙고해보게 되는데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힘은 상황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서정적 단편 ‘개방’을 보자.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중학교 대체 교사로 일하는 나, 앤디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촉각도 말도 필요 없다. 생각이나 하고 싶은 말은 상대방을 보고 눈을 깜박거리면 문자메시지처럼 의식으로 전송된다. 필요한 이미지나 사진까지 모두. 교실에서 앤디와 학생들은 인사도 대화도 나눌 필요가 없다. 그저 눈만 깜박이면 될 뿐.
인물들은 층, ‘레이어Layers’라는 일종의 소통 방식 기술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서로 연결 상태를 유지하며 모르는 사람에겐 사용자의 이름 같은 외부 층위 정보만 공유하고 상대방과 뜻이 통하면 그 아래의 레이어, 두 번째 층위에 대한 접근 제한을 풀 수가 있다. 즉 만나는 사람들과 대체로는 표면적이고 소모적인 관계만 가질 수 있을 뿐. 그래서 종종 앤디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는 레이어와 함께 자란 세대지만 유년에 겪은 삶의 방식을 다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어를 꺼버린 상태로는 지내기는 어렵다. ‘꼰대 취급’을 받게 될 거고 혼자만 단절된 채 지낸다는 게 두렵기도 해서.
어느 날 그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사용자 명은 케이티, 메인주 태생이며 싱글. 이런 정보들은 그냥 허공에 개방돼 눈에 보인다. 그가 눈을 깜박거리며 케이티의 고향에 관심을 보이자 그녀도 윙크하곤 소나무 숲이 있는 호숫가 오두막의 이미지를 바로 전송시켜주었다. 평화롭고 고요해 보이는 곳이었다. 마치 지금 앤디의 내면과 무의식이 원하는 장소처럼. 케이티는 ‘아직도 말을 하고 싶어하는 노인들에게 레이어 사용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 되어 케이티의 아버지가 산다는 오두막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소나무가 울창한 진입로에서부터 레이어의 수신 상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자 케이티가 말했다. 서로 로그아웃하는 게 낫겠다고.
앤디가 두려워하는 작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레이어 없이 누군가에게 접근해본 적도 없고 소리 내서 어떤 말로 인사를 시작하는지도 모르는 데다 손짓으로 표현하는 일에도 서투니까. 케이티의 아버지 벤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통신을 차단한 채로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는 사람이었다. 옛날 사진들을 보고 호숫가에서 낚시하고 숲길을 산책하고 낚시한 송어로 저녁 요리를 하고 딸이 찾아오면 주사위 놀이를 하며 “옛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 오두막에서의 고요한 경험이 앤디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켰다. 레이어 없이, “사랑해”라고 처음 말해 버린 것이다. 공기에 닿은 그 소리가 가슴으로 이어지던 울림과 파동. 이제 보다 큰 상황이 일어날 차례가 왔다. 사랑하는 사이니까 서로 모든 레이어의 접근 권한을 허용해 버리자고 그들은 결정했다. 각자 보여주지 않았고 숨겨왔던 상처와 결함들로 가득찬 레이어를 들여다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겐 모든 것을 보여주면 더 가까워질 거라고 믿었는데. 혼자가 된 앤디는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따뜻한 거실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던 순간들, 귀뚜라미 소리, 담요의 포근함과 케이티의 얼굴을. 모두 기억의 파편이 된 무형의 것들을.
타인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서 나의 보여지는 자아와 숨겨진 자아를 어디까지 개방하고 감춰야 할까?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서도 가끔 어떤 레이어는 숨기고 차단하는 게 상대에 대한 배려가 된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 결정이 실수와 후회로 남아도 무엇을 드러내고 숨길까를 고민하고 선택하기가 감정을 가진 ‘인간’의 일이기도 하니까.
이 ‘개방’이 수록된 단편집에는 영화 ‘애프터 양’의 원작 ‘양과의 작별’이 맨 앞에 실려 있다. 이런 세계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좋은 SF 단편들이 남기는 질문은 두렵긴 해도 적극적으로 그 답을 모색해보고 싶게도 만든다.
조경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