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소녀 엘리자벳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계기로 신비로운 존재 ‘죽음’과 처음 마주한다. 이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청혼을 받아들여 황후가 된다. 하지만 시어머니인 대공비 소피가 강요하는 엄격한 궁정 생활은 힘겹고 자유를 향한 갈망은 커져만간다. 아들 루돌프 황태자와의 관계마저 악화하면서 황실의 불화는 제국 몰락의 전조와 겹쳐진다.
2012년 국내 초연 이후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엘리자벳’이 10여 년 만에 무대와 의상을 대대적으로 바꾼 새 프로덕션으로 돌아왔다. 더욱 화려해진 무대가 ‘회전문 관객’을 부르는 이유를 실감케 한다. 독일 뮤지컬 ‘최고봉’으로서 미하엘 쿤체의 촘촘한 서사와 실베스터 르베이의 강렬한 음악에 시각적 효과와 무대 완성도까지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후 14개국에서 10개 언어로 공연돼 세계 누적 관객 1270만명을 넘긴 뮤지컬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황후가 된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따라가는 성장극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몰락을 바라보는 역사극이라는 데 있다. 실존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 ‘ 죽음’이 엘리자벳을 내내 따라다니며 저승의 평안으로 함께 가자고 유혹하는 설정이 극에 독특한 결을 더한다. 사후 100년째 재판을 받으며 엘리자벳 일생을 관객에서 해설하는 황후 암살범 루이지 루케니가 노래로 부르는 사회 비판도 흥미롭다.
덕분에 ‘엘리자벳’은 흔한 황실 로맨스물의 범주를 훌쩍 벗어난다. “황후는 빛나야 한다”며 제국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강요하는 궁정에 맞서 엘리자벳은 끊임없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 한다. 그 선언이 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노래 ‘나는 나만의 것’으로 압축된다. 엘리자벳은 헝가리에서 열린 대관식 후 ‘내가 춤추고 싶을 때’에 이르면 삶의 시간과 장소, 춤까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죽음’에게 맞선다. 한 여성의 자아 찾기가 이러한 무대를 통해서 대중적이면서도 선명하게 실현된다. 그래서 많은 여배우가 탐내는 주인공이다.
무대 뒤편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락이 쉼 없이 흐른다. 1848년 혁명의 상처가 남은 젊은 황제의 통치에서 시작해 헝가리 민족주의의 대두, 빈 시민사회의 구체제에 대한 냉소, 황태자 루돌프와 황제의 정치적 대립까지 이어지며 영화롭던 제국에는 균열이 차곡차곡 쌓인다. 황족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가정의 비극이 구체제 몰락과 겹쳐지는 서사는 ‘엘리자벳’이 여성극인 동시에 역사극으로 읽히는 까닭이다.
이번 시즌에는 이 역사적 스케일을 담는 그릇도 완전히 달라졌다. 엘리자벳의 부채를 모티프로 거대한 프로시니엄을 세우고,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조형물을 무대 곳곳에 배치했다. 이전 무대 중심에 놓였던 거대한 황후 초상화는 사라지고 엘리자벳의 화려한 머리 장식을 본뜬 대형 액자와 드레스 오브제가 이를 대신한다. 승강형 플랫폼이 오르내리며 무대에 입체감을 더했으나, 작동이 매끄럽지만은 않은건 옥에 티다.
무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대형 회화처럼 펼쳐진다. 검푸른 황실 공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독수리, 헝가리 삼색기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대관식, 붉은 깃발과 불길이 뒤엉키는 혁명의 거리, 안개가 흐르는 호숫가와 외로운 나무까지 영상과 세트가 빠르게 결합한다. 프로시니엄 후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의 선명도가 특히 돋보인다. 다만 일부 장면은 영상에만 의존하다 보니 다소 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화려한 궁정과 어둡고 불안한 민중의 공간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 장면들에서는 영상과 세트, 의상이 함께 어우러지며 제국 말기의 불온한 공기를 효과적으로 빚어냈다.
의상도 볼거리다. 이번 시즌 엘리자벳을 위해서만 의상 16벌을 새로 만들었고, 시대별 실루엣을 달리하기 위해 패티코트도 6종을 제작했다. 소녀에서 황후로, 다시 검은 상복을 입고 유럽을 떠도는 고독한 여인으로 변해가는 시간이 갖가지 의상으로 표현된다.
2일 저녁 공연에서는 이지혜가 엘리자벳, 서경수가 죽음, 박은태가 루케니, 민영기가 프란츠 요제프로 호흡을 맞췄다. 2022년에 이어 다시 엘리자벳을 맡은 이지혜는 한층 안정된 무대를 보여줬다. 자유분방한 소녀에서 황후로 성장해서 비극을 거듭 겪으며 고독해지는 중년의 여인까지 긴 시간을 자연스럽게 관통했다. 정확한 발성과 쭉 뻗는 고음, 대극장을 채우는 성량이 돋보였다. 이번 시즌 처음 ‘죽음’을 맡은 서경수와 박은태 역시 베테랑 뮤지컬 배우다운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자유를 추구한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가다 대제국이 무너지는 광경까지 보여주는 멋진 뮤지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