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의 신제품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한 번에 많이 먹기보다 필요한 만큼 먹으려는 수요에 맞춰 용량은 줄이고, 말차와 매운맛처럼 취향이 뚜렷한 맛은 더욱 전면에 내세우는 식이다.
브랜드끼리 손잡는 협업도 빠지지 않는다. 이름만 빌려 화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익숙한 제품에 새로운 맛과 이야기를 입혀 소비자가 다시 찾게 만드는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출시되는 신제품에는 소용량과 식단관리, 강한 맛, 협업 등 달라진 소비 흐름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최근 110g 용량의 백미밥 '햇반 부드러운 미니밥'을 출시했다. 기존 즉석밥 한 개가 부담스러운 소비자나 식사량을 조절하는 수요를 겨냥한 제품이다.
지난 6월 파로통곡물밥과 렌틸콩현미밥으로 구성된 '햇반 라이스플랜 미니밥'을 선보인 데 이어 백미까지 소용량 제품군에 넣었다.
이는 한 제품만의 변화가 아니다. CJ제일제당은 올해 초 한국인의 식문화 흐름을 분석하면서 '개인화'를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꼽고 다양한 식품에서 1~2인분과 소용량 제품을 늘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건강을 챙기면서도 조리 과정과 음식물 낭비를 줄이려는 수요가 함께 커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식품업계가 '푸짐함'만으로 승부하던 데서 벗어나 한 끼 양까지 세분화하기 시작한 셈이다.
용량이 작아지는 것과 반대로 맛은 한층 선명해지고 있다.
매일유업은 오트 음료 '어메이징 오트'에 말차를 더한 '어메이징 오트 말차'를 출시했다. 최근 카페와 디저트 시장에서 인기가 이어지고 있는 말차를 식물성 음료에 접목했다. 매일유업은 신제품 출시와 함께 소비자 체험단 운영에도 나섰다.
말차 열풍을 잡으려는 곳은 매일유업뿐만이 아니다. CJ제일제당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말차 관심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자체 트렌드 분석 플랫폼을 활용해 '말차 햇반'을 개발했다. 단백질 브랜드 '단백하니'에도 말차맛 쉐이크와 말차초코 프로틴바를 추가했다.
매운맛 경쟁도 이어진다.
롯데리아는 대표 메뉴인 '리아 불고기'에 매운맛을 더한 '리아 불고기 레드' 2종을 내놨다. 오뚜기의 타바스코 역시 멕시칸 음식 브랜드 타코부스와 손잡고 '치폴레 싸이 타코 위드 타바스코 살사 피칸테'를 기간 한정으로 선보였다.
새로운 메뉴를 처음부터 개발하기보다 소비자가 이미 아는 제품에 말차나 매운맛처럼 유행하는 맛을 입히는 방식이다. 신제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면서도 기존 제품과 차별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최근 신제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협업이다.
배스킨라빈스는 일본 디저트 브랜드 '도쿄바나나'와 손잡고 9월 이달의 맛 '도쿄바나나 크렘브륄레'를 출시했다. 던킨은 천안의 대표 호두과자 브랜드 '할머니학화호도과자'와 협업해 말차와 앙버터를 활용한 신제품 2종을 내놨다.
삼립은 추석을 앞두고 제주우유와 협업한 '골든 모먼츠' 선물세트 4종을 선보였다. 이디야커피는 산리오캐릭터즈와 네 번째 협업에 나서 한국 전통 요소와 가을 분위기를 담은 음료와 굿즈를 출시했다.
이디야와 산리오캐릭터즈의 협업 행사는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말까지 진행된다. 반복적인 협업을 통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시즌 마케팅으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업계에서 협업은 이미 매출을 만드는 하나의 상품 개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CJ제일제당이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출연 셰프들과 개발한 간편식은 올해 상반기에만 누적 매출 37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1월 첫선을 보인 뒤 최강록·윤나라·최유강·권성준 셰프 등과 협업한 제품을 43개까지 늘렸다.
CJ제일제당은 비비고·다시다·햇반 등 자체 브랜드 지식재산권(IP)을 다른 상품군으로 옮기는 시도도 확대하고 있다. 편의점 판매 데이터를 분석해 햇반 라이스크림과 라이스라떼 등 기존 즉석밥과는 전혀 다른 상품을 개발했다.
신제품 경쟁은 가공식품과 외식 메뉴에만 머물지 않는다.
CJ푸드빌이 운영하는 뚜레쥬르는 서울의 낮과 밤에서 영감을 얻은 케이크 '글로우 오브 시티'를 선보였다. 단순히 맛을 앞세우기보다 도시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제품에 입혀 시각적 경험까지 강조했다.
면사랑은 짜장과 파스타 등 중식·양식 면요리에 사용할 수 있는 냉동 소스 5종을 출시하며 기업간거래(B2B) 전용 제품군을 확대했다. 소비자가 직접 사는 완제품뿐 아니라 외식업체가 조리 과정에서 사용하는 식재료 시장까지 상품 경쟁이 번지고 있다.
현대그린푸드는 호주축산공사와 손잡고 '호주청정램'을 활용한 양 티본 스테이크를 단체급식 메뉴로 내놨다. 일반 소비자가 찾는 외식 메뉴를 사내식당으로 가져오면서 급식에서도 메뉴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롯데칠성음료는 '클라우드 논알콜릭'에 천연 레몬·라임향을 넣은 한정판을 출시하며 비알코올 맥주 선택지를 넓혔다.
최근 업계의 신제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세분화'다. 누구나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상품 하나를 만드는 대신 먹는 양과 건강 관심도, 선호하는 맛과 캐릭터까지 소비자 취향을 잘게 나눠 제품에 반영하고 있다.
신제품의 수명도 짧아지고 있다. 소비자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빨리 찾아내고, 익숙한 브랜드와 새로운 맛을 조합해 얼마나 빠르게 제품으로 내놓느냐가 중요해졌다. CJ제일제당이 실제 판매 데이터와 소비자 반응을 상품 중량과 콘셉트 결정에 활용하고, AI로 식품 트렌드까지 분석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결국 지금 식품업계에서 팔리는 것은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음식만이 아니다. 익숙한 제품을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양과 맛, 방식으로 얼마나 빨리 바꿔놓느냐가 신제품 경쟁의 승부처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