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타인의 삶’의 두 번째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시네필 사이에서 ‘내 인생의 영화’로 손꼽혀온 동명 영화를 오랫동안 배우로 활동한 손상규가 직접 각색하고 연출해 2024년 초연한 작품이다.
독일이 동서로 나뉘어 있던 시절, 게르트 비즐러는 ‘당의 방패와 검’을 자처하는 동독 국가보안부 슈타지의 비밀경찰 대위다. 불온한 생각은 티끌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체제의 충실한 수호자다. 그런 그에게 저명한 극작가 게오르그 드라이만을 밀착 감시하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그러나 드라이만의 집 곳곳에 설치한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것은 반체제 음모나 불온한 사상이 아니다. 사랑과 다툼, 우정과 좌절, 시와 음악 그리고 폐쇄된 체제 아래 신음하는 예술가들의 삶이 흘러들어온다.
영화에서는 다락방의 감청실과 드라이만의 거실을 교차편집한다. 카메라도 편집도 없는 무대에서 손상규는 그 제약을 연극의 언어로 돌파했다. 최소한의 의자와 테이블, 소품과 조명만으로 심문실과 극장, 드라이만의 거실과 슈타지 사무실 등 30개 가까운 장면을 110분 동안 쉼 없이 만들어낸다.
비즐러의 감청은 움직임으로 구현된다. 그는 드라이만과 연인 크리스타의 일상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두 사람을 감시한다. 등장인물들은 바로 곁에 선 비즐러를 보지 못하지만 관객은 그의 존재를 똑똑히 본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공포를 만든다면 연극에서는 감시자를 무대 위에 유령처럼 드러냄으로써 사생활 깊숙이 침투한 국가권력의 음험함을 체감하게 한다.
철저한 당원이었던 비즐러에게 생기는 첫 균열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권력의 부패에서 시작된다. 크리스타가 억지로 타고 간 리무진의 번호를 조회한 그는 문화부 장관 햄프가 국가안보와 무관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슈타지를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수호자라 믿었던 자신이 실은 권력자의 사욕을 위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그 균열 속으로 타인의 삶이 흘러든다. 비즐러는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 좌절과 죽음을 엿듣는 동안 자신에게서 지워졌던 감성과 양심을 조금씩 되찾는다. 예술은 그의 이념을 논리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신 이념이 봉인했던 인간의 감각을 다시 깨운다.
연극 무대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꼽히는 윤나무의 비즐러는 감탄스럽다. 사회주의가 온몸에 체화된 듯 꼿꼿하고 냉랭했던 인물이 서서히 무장해제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윤나무는 인물의 변화에 뚜렷한 분기점을 찍지 않는다. 몸의 긴장과 시선, 말의 속도와 호흡을 조금씩 풀어놓을 뿐이다. 관객이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처음과 다른 인간이 무대에 서 있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와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에 이어 윤나무를 대표할 또 하나의 작품이 됐다.
문화부 장관 햄프와 블랙리스트에 희생된 연출가를 오가는 김정호의 연기도 매력적이다. 한 배우의 몸 안에 예술가를 짓밟는 권력과 그 권력에 짓밟힌 예술가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묘한 연극적 아이러니를 만든다. 초연부터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이 중심을 잡은 무대는 빠른 장면 전환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배우들의 정교한 합이 긴장과 속도를 끝까지 유지한다.
인간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예술은 어떻게 이념이 봉인한 인간의 감각을 다시 깨우는가.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는 일은 어떻게 한 인간을 바꾸는가.
작품은 거창한 선언으로 답하지 않는다. 감시 대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보고서의 문장을 지우고 증거를 감추며 자신의 안위를 거는 비즐러의 선택으로 답한다. 마지막에는 드라이만 역시 남겨진 기록 속에서 비즐러의 감춰진 삶을 발견한다.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연결되는 순간이 큰 감동을 준다. LG아트센터 서울에서 9월 13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