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을 사러 갔는데 매장 한쪽에 약사가 기다리고 있다. 피부 상태를 설명하면 화장품뿐 아니라 약국에서 취급하는 기능성 제품과 관련 의약품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이 같은 ‘약국형 뷰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올리브영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국내 헬스앤뷰티(H&B) 시장의 경쟁축이 성분과 기능을 강조한 ‘파머시 뷰티’로 빠르게 옮겨가는 모습이다.
7일 업계에 따르면 무신사 뷰티는 온누리약국과 손잡고 오는 11일 서울 마포구 홍대에 문을 여는 ‘무신사 뷰티 홍대’에서 ‘파머시 뷰티(Pharmacy Beauty)’를 선보인다.
무신사 뷰티 홍대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약 400평 규모로 조성된다. 이 가운데 온누리약국이 지하 1층 전체에 들어선다. 영업면적은 176㎡, 약 53평이다. 무신사는 홍대 매장을 11일부터 운영하며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여권 인증 할인도 마련했다.
핵심은 단순히 뷰티 매장 안에 약국을 들여놓는 데 있지 않다. 무신사가 확보한 고객 데이터와 뷰티 트렌드 분석을 토대로 온누리약국이 판매하는 고기능성 화장품과 이너뷰티 상품 가운데 수요가 높은 상품을 함께 선별한다.
약사도 상주한다. 모발·두피 관리와 여드름·트러블 등 피부 고민별 전용 큐레이션 공간을 마련해 고객이 화장품과 약국 전용 제품, 필요한 경우 일반의약품까지 한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기존 H&B 매장이 ‘어떤 제품이 유행하느냐’를 보여줬다면 파머시 뷰티는 ‘내 피부 고민에 어떤 성분이 필요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제약업계에서는 이미 약국을 새로운 화장품 유통채널로 키우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동국제약은 더마 리페어 브랜드 ‘마데카파마시아’를 전국 5000여개 약국에 공급하고 있다. 전체 약국의 30%가 넘는 규모다. 마데카파마시아는 센텔라아시아티카 정량추출물(TECA) 등을 앞세워 피부 보습과 탄력, 잡티, 각질 관리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백화점의 클린뷰티 편집숍 ‘비클린’에도 입점하며 약국 밖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동국제약은 약국 내에 고기능성 화장품을 따로 모은 ‘파마시 뷰티 솔루션’ 형태의 공간도 확대하고 있다. 일반 화장품 시장에서는 ‘센텔리안24’를, 약국에서는 보다 기능성을 강조한 제품군을 내세우는 이원화 전략이다.
대웅제약도 더마코스메틱 브랜드 ‘이지듀’를 통해 피부과 시술 뒤 진정과 피부장벽 회복에 초점을 맞춘 애프터케어 제품을 강화하고 있다. 한미사이언스 역시 일반 유통용 더마 브랜드와 별도로 약국 전용 브랜드 ‘프로캄’을 운영하는 등 제약사들의 약국 뷰티 시장 공략이 본격화하고 있다.
제약사가 약국에서 화장품을 파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달라진 점은 약국이 단순 판매처가 아니라 ‘전문성이 있는 뷰티 매장’으로 재설계되고 있다는 데 있다.
국내 최대 H&B 플랫폼인 CJ올리브영도 이 시장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는다.
올리브영은 올해 3월 고기능 더마 화장품을 따로 묶은 ‘어드밴스드 더마(Advanced Derma)’ 카테고리를 선보였다. 출시 4개월 만인 지난달 전용 매대를 전국 650개 매장으로 확대했다.
일반 기초화장품보다 성분과 기술력을 강조한 제품을 한데 모아 피부 고민별 선택을 쉽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피부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스킨스캔 등 체험 요소도 강화하고 있다.
올리브영에서 최근 ‘성분 뷰티’가 빠르게 성장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올리브영 온라인몰에서 PDRN 검색량은 한때 전년 대비 695%, 펩타이드는 72% 증가했다. 소비자가 브랜드 이름보다 성분과 기능을 따져 제품을 찾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무신사가 ‘약사와 약국’을 직접 매장 안으로 끌어들였다면 올리브영은 기존 H&B 매장 안에서 약국에 가까운 고기능성 더마 영역을 키우는 방식으로 맞서는 셈이다.
시장 변화에 불을 붙인 것은 외국인 관광객이다.
BC카드가 올해 상반기 방한 외국인의 소비를 분석한 결과 약국 이용금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76.9% 급증했다. 피부미용 이용금액도 109.8% 늘었다. 전체 의료 이용금액은 98% 증가했다.
외국인 의료 소비 가운데 피부미용과 약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커지고 있다. 기존의 성형수술 중심 의료관광이 피부과 시술과 스킨케어, 약국 쇼핑으로 세분화되는 것이다.
실제 명동과 홍대, 성수, 강남 등 주요 관광 상권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약국이 빠르게 늘고 있다. 약국 안에 화장품처럼 제품을 진열하고 외국어 안내와 택스리펀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다. 여드름·흉터·색소침착·피부재생 관련 제품을 SNS에서 미리 검색한 뒤 약국을 찾는 관광객도 늘었다.
과거 외국인의 K뷰티 쇼핑 동선이 ‘올리브영→다이소→브랜드숍’이었다면 최근에는 여기에 약국이 하나의 목적지로 추가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무신사가 첫 파머시 뷰티 매장을 명동이나 강남이 아닌 홍대에 낸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홍대는 2030세대와 외국인 관광객이 동시에 몰리는 대표 상권이다. 올해 외국인의 서울 내 카드 결제금액 순위에서도 홍대가 속한 서교동은 상위권에 올랐다.
해외에서는 약국과 뷰티를 결합한 유통 형태가 이미 익숙하다.
일본의 대표 드러그스토어 마츠모토키요시는 일반의약품과 처방조제 기능은 물론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한 매장에서 판매한다. 일부 매장은 별도의 조제약국 창구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SK-II 등 고가 화장품까지 취급한다.
한국에서도 올리브영이 처음 성장할 당시 해외 드러그스토어 모델과 비교됐지만 이후 뷰티 비중을 크게 높이며 독자적인 H&B 형태로 진화했다. 현재 올리브영은 전국 138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나타나는 ‘K파머시’는 다시 약국과 뷰티가 결합하는 흐름이지만 일본식 드러그스토어와는 방향이 다르다. 약국 자체를 대형화하기보다 피부 고민별 고기능 제품과 약사 상담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유통업계가 이 시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립스틱이나 쿠션처럼 유행에 따라 구매하는 제품과 달리 여드름, 탈모, 피부장벽, 색소침착, 시술 후 관리 제품은 소비자가 성분과 효능을 더 꼼꼼히 따진다. 가격뿐 아니라 누가 추천했는지가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다.
약사의 전문성이 새로운 ‘판매 경쟁력’으로 부상한 이유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기존 뷰티 매장은 트렌드와 브랜드 큐레이션이 핵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성분과 효능을 얼마나 신뢰감 있게 설명해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약국과 제약사가 가진 전문성이 뷰티 유통과 결합하는 사례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