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신작 ‘역행기’(사진). 이 낯선 작품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만나려면 무대가 설설 끓어오르는 후반부까지 기다려야 한다. 생경한 수메르 신화에 여성 3대의 고난사가 포개지고 특유의 발성·화법과 몸짓 연기가 이어져 처음엔 무엇을 보고 있는지 헤매지만 흩어진 조각은 차츰 하나로 맞아 들어간다.
햇볕조차 사치인 좁은 방에서 바닥에 붙어 살던 인안나는 집이 무너지면서 미지의 지하세계로 떨어진다. 동시대 고립·은둔 청년을 보며 김주희 작가가 구상했고 자신의 어두운 방 생활도 투영한 인물이다. 인안나는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몸에 뿌리가 돋은 할머니 ‘주머니’, 망치를 짊어진 언니 ‘핑크’, 돌과 한몸이 되어가는 ‘돌덩이’, 어머니 ‘에레쉬’를 만난다. 이들의 삶은 식민지와 빈곤, 산업화와 여성 노동, 산업재해와 감정노동, 부채와 고립으로 이어진다.
국립극단이 2024년 15년 만에 재개한 창작희곡공모에서 303편 가운데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신재훈 연출과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는 방대한 세계를 단순한 무대 문법으로 풀었다. 반지하 장판을 걷어내면 나올 듯한 시멘트 바닥이 가운데 사각형을 남기고 솟아오르며 지하세계가 만들어진다. 천장으로 올라간 바닥은 스크린이 돼 검은 암반에서 일렁이는 수면으로 변한다. 이승호의 음악도 존재감이 크다. 연극 무대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음악들이 지하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인터미션 포함 200분. 인안나가 가족들의 삶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관객마저 지치게 하지만 그 끝 무렵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낼 용기를 얻는다. 역행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아 내려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끊어낼지 결정하는 일이다. 긴 공연시간 자체가 그 어려움을 체험하게 한다.
배우들 연기도 인상적이다.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일상적인 화법과 발성에서 벗어나 발화하면서 태극권이나 요가를 떠올리게 하는 자세를 취하고 양손으로 도형을 그리듯 움직인다. 낯선 몸짓으로 일상이 아닌 신화의 세계를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특히 아름답다. 절단된 팔 자리에 날개가 돋은 어머니 에레쉬가 딸의 뒤에서 검푸른 날개를 펼친다. 앞선 세대가 가장 어린 여성을 자신들과 같은 고통 속에 남겨두지 않고 지상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이다.
집으로 돌아온 인안나는 창문과 방문을 열고 망가진 살림살이를 버리며 방을 치운다. 살아야 할 이유는 먼 곳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시 움직이며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3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