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기고] 9월10일, 오늘만큼은 괜찮아?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9월10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는 2011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이날을 ‘자살예방의 날’로 지정했다.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생명존중 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날이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이날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럴 만도 하다. 자살이라는 문제는 무겁고 조심스럽다.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일이 아니라면 일부러 관심을 두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더 안타깝게 느낀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너무 자주 들어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자살을 예방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수많은 정책을 만들었지만, 좀처럼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통계가 하나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교통사고로 매년 1만 명 넘게 목숨을 잃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5년에는 6376명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2549명까지 감소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동차는 훨씬 많아졌다. 그런데 교통사고 사망자는 크게 줄었다. 물론 그 변화에는 도로와 자동차의 안전기술 향상, 단속과 제도 개선 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국민의 인식 변화’였다고 본다.

 

대표적인 것이 음주운전이다. 과거에는 술을 조금 마시고 운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다르다. 음주운전은 운전자 자신뿐 아니라 아무 관계도 없는 누군가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았다. 안전벨트 착용과 보행자 보호에 관한 생각도 크게 달라졌다.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자, 행동이 달라졌고, 행동이 달라지자 결국 숫자가 달라졌다. 나는 자살예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국가적으로도 소중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정책과 지원제도가 있어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손길은 닿을 수 없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경찰과 소방, 의료기관과 복지기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 사람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가족이고 직장 동료이며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일지 모른다.

 

자살예방이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 거창한 일을 떠올리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상담할 줄 알아야 하며, 누군가를 설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평소 자주 보이던 이웃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 늘 연락하던 사람이 연락을 끊는 것, 직장 동료가 평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만 알아챌 수 있는 변화가 있다. 그때 “무슨 일 있어?”, “요즘 괜찮아?”, “혹시 자살 생각하고 있어?”라고 한 번 더 묻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전문기관이나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됐고 기대수명 역시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론을 통해 고독사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접한다. 고립·은둔 청년에 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2023년 관련 실태조사에서는 고립·은둔 청년 가운데 상당수가 자살을 생각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풍요로워졌지만 외로운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1인 가구가 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예전과 달라졌다. 같은 아파트에 몇 년을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2024년 고독사 사망자 가운데 526명, 13.4%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통계는 그런 현실을 더욱 무겁게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발견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아야 한다. 반드시 내가 그 사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할 수도 없다. 다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관계기관이나 전문기관에 알리고, 필요한 지원과 연결될 수 있도록 작은 다리를 놓아줄 수는 있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위기는 찾아올 수 있다. 실직할 수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도 있으며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될 수도 있다. 평생 단단하게 살아온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예방은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정책이 아니다. 어쩌면 언젠가 나와 내 가족, 내 동료와 이웃을 위한 일일 수 있다.

 

박승일 경감·국무조정실 범정부 생명지킴추진본부
박승일 경감·국무조정실 범정부 생명지킴추진본부

가장 두려운 것은 위기에 놓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내는 신호를 우리가 모두 보고도 지나치는 것인지 모른다. “설마 그런 생각까지 하겠어”, “괜히 물어보면 실례겠지”라며 지나친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순간일 수도 있다. 생명을 지키는 일 앞에서는 지나친 관심보다 무관심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자살예방의 날을 맞아 거창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전화 한 통을 해도 좋고, 혼자 지내는 이웃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도 좋다. 유난히 힘들어 보이는 동료에게 “요즘 괜찮아?”라고 물어봐도 좋다. 교통사고를 줄여온 지난 시간처럼 자살 역시 우리 사회의 인식과 행동이 달라진다면 분명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을 살리는 시작은 거대한 정책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 내가 건넨 짧은 안부 한마디일지도 모른다.

 

박승일 경감·국무조정실 범정부 생명지킴추진본부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자살예방 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 기사는 자살예방 보도준칙 4.0을 준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