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국내 언론의 보도 행태는 갈렸다. 통감부와 친일 매체들은 안 의사를 흉한(兇漢)이나 폭도(暴徒)로 몰아가는 프레임을 씌웠다. ‘경성신보’가 같은 해 11월10일자 지면에 사슬에 묶이고 족쇄가 채워진 초췌한 모습의 안 의사 사진을 싣고 비하 목적으로 대중에 배포한 게 대표적 사례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이 재판 과정과 안 의사의 진술을 상세히 인용했을 뿐이다. 엄혹한 세월이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의 소소한 홍보 게시물 한 줄이 역사의 아픈 비극을 끄집어내는 도화선이 됐다. 경기 안양시가 공식 블로그에 올렸던 ‘안양의 독립운동가 안상호(1872∼1927)’ 게시물이다.
비공개로 전환됐지만 논란은 일파만파 커졌다. 일제강점기 의사로서 지역사회에 기여했던 인물이자 여배우의 증조부로 소개된 안상호. 1916년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뒤늦게 재조명됐다.
언론은 안상호가 일본 유학 중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중매를 서고 도움을 준 인물이 친일반민족행위자 구연수였다는 사실도 전했다. 구연수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뒤 일본으로 도피했던 인물이다. 촉탁의로서 고종을 마지막까지 진료한 의사였던 안상호를 두고 고종 독살설이 다시 거론된 이유다. 악화한 민심을 드러낸 셈이다.
무심하게 방송에 출연, 증조부를 자랑했던 여배우는 경솔함을 사과했다. 실수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이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
역사의 물줄기는 때로 잔혹한 반전을 품는다. 일제의 압제에 맞서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고 피 흘려 싸웠던 애국지사들이 세월이 흘러 식민 지배의 부역자로 전락했던 비극은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흔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겨냥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했던 위암 장지연이 대표적이다. 그는 국권침탈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글을 지속해서 써 내려 갔다. 정부는 2011년 그의 건국훈장을 박탈했다.
초대 내무부 장관 윤치영,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서춘, 개신교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박연서 등 한때 민족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수많은 인물이 일제 말기 변절의 길을 걸어 유공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무장 투쟁의 전설조차 도마 위에 올랐다.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진동 장군은 1930년대 후반 친일파로 전향해 일본에 협조하고 헌금을 냈다는 의혹을 받았다. 정부는 2018년 ‘가짜 독립유공자 검증 작업’에 착수했지만, 진위를 가리지 못했다.
역사 앞에 ‘성역’은 존재할 수 없다. 역사의 공과(功過)는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명성에만 매달려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인물을 포장하는 행태는 역사의 왜곡을 낳을 뿐이다.
친일 이력을 엄정히 재검증하고 가짜 영웅을 가려내는 작업은 과거를 파헤쳐 단죄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엄혹한 광풍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목숨을 바친 진짜 순국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