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결제가 빠르게 확산해온 유럽에서 현금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카드와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일상 결제가 가능해지면서 현금 사용 자체는 계속 줄고 있지만, 정전이나 통신망 장애, 사이버공격으로 디지털 결제망이 멈출 경우에 대비한 비상 결제수단으로 현금을 일정액 보유하려는 움직임도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덴마크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지난 6월26일 발표한 결제수단 분석에서 가구 구성원 1명당 250덴마크크로네(약 5만원) 정도의 현금을 소액권과 동전으로 보유할 것을 다시 권고했다. 카드 결제가 먹통이 된 뒤에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역시 이용하기 어렵거나 아예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현금을 미리 확보해둬야 한다는 설명이다.
◆현금 결제는 줄고 ‘비상용 현금’은 늘고
유럽은 이미 상당기간 ‘현금 없는 사회’를 향해 빠르게 변화해왔다. 스마트폰과 비접촉식 카드가 빠르게 보급되고 온라인 상거래가 확대된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디지털 결제로의 전환 속도가 한층 가속화된 덕분이다. 유럽중앙은행(ECB)에 따르면 유로존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금으로 이뤄진 결제 비중은 2016년 79%에서 2019년 72%, 2022년 59%, 2024년 52%로 꾸준히 낮아졌다. 현금을 쓰는 소비자가 줄면서 현금을 취급하는 업체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ECB의 2024년 조사에서 현금을 받지 않는 업체들은 가장 큰 이유로 ‘고객이 현금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다’(39%)를 꼽았다. 현금을 은행에 입금하거나 인출하기 번거롭다는 답변도 22%였다. 소비자가 현금을 덜 쓰고, 업체도 현금 취급을 줄이면서 디지털 결제 의존도가 더 높아지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덴마크 역시 마찬가지로 현금 결제 비중이 계속 감소해왔다. 오프라인 상거래에서 현금으로 이뤄진 결제 비중은 2017년 23%에서 2023년 11%, 지난해 9%로 줄었다. 전체 오프라인 결제의 90% 이상이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애플페이·구글페이 등 모바일지갑을 이용한 결제는 오프라인 결제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하지만, 반작용으로 비상시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는 국민도 늘었다. 1000덴마크크로네(약 20만원)가 넘는 현금을 갖고 있다는 응답자는 2023년 33%에서 지난해 41%로 8%포인트 증가했다. 현금 보유자의 약 70%는 카드나 모바일 결제가 불가능해질 경우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답했다. 평소에 현금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결제망이 멈출 경우에 대비해 현금을 별도로 챙겨두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ECB 조사에서도 ‘현금으로 결제할 수 있는 선택지가 중요하다’고 답한 유로존 소비자는 2022년 60%에서 2024년 62%로 늘었다. 평소 결제에서는 현금이 밀려나고 있지만, 통신 장애나 정전, 사이버공격 등으로 전자결제망이 작동하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예비 결제수단’으로서 현금의 가치는 다시 부각되고 있다.
◆카드 한번 멈추자 북유럽 결제망 ‘휘청’
이는 결제수단이 디지털망에 집중되면서 한 번의 장애가 미치는 충격이 커진 탓이다. 지난 5월21일 북유럽 주요 결제업체 네츠(Nets)의 사고가 대표적이다. 당시 네트워크에서 오류가 발생하자 오전 9시쯤부터 카드 결제가 잇따라 거부됐다. 네츠는 덴마크 전체 카드 거래의 약 80%를 처리하는 업체로, 북유럽에서 14만개가 넘는 사업체가 네츠의 결제 솔루션을 이용하고 있다. 당시 네츠는 결제의 “대부분이 거부되고 있다”고 밝혔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을 중심으로 노르웨이·핀란드까지 장애가 번졌다. 북유럽 상거래가 한순간에 멈춘 셈이다. 결제 처리는 오후 2시쯤부터 단계적으로 정상화됐다. 해당 사례는 사이버공격이 아닌 단순 네트워크 연결 오류였음에도 하나의 결제 인프라 문제가 여러 나라의 일상 결제를 동시에 흔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현금이 이 같은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지난 6월 발표한 결제행태 분석에서 현금과 모바일뱅킹·모바일페이를 이용한 계좌 간 즉시이체가 당시 사고에서 카드 결제의 대안으로 작동했으며, 즉시이체 이용이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울리크 뇌드고르 덴마크 중앙은행 총재도 같은 날 “더 많은 서로 다른 결제수단을 갖고 있을수록 더 많은 상황에서 결제할 수 있다”며 카드 결제 인프라가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에 더 많은 국민이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이버공격에 대한 경계도 커지고 있다. 공격 건수 자체가 급증한 것은 아니지만 지정학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금융 인프라가 국가 차원의 사이버공격 대상이 될 위험이 커졌다는 게 노르웨이 당국의 판단이다. 노르웨이 금융감독청은 지난 5월 발표한 ‘2026 위험·취약성 분석’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중국·북한·이란 등의 국가 행위자를 주요 사이버 위협으로 지목하며 금융권을 겨냥한 악성 사이버작전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금융사들이 소수의 외부 정보통신기술(ICT)·클라우드·결제업체에 의존하는 구조도 취약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혔다.
지난해 노르웨이 금융권이 신고한 보안사고 14건 가운데 5건은 분산서비스거부(DDoS) 공격이었다. 특히 결제기관에서는 하청업체를 겨냥한 DDoS 공격으로 카드 거래에 차질이 발생한 사례도 보고됐다. 금융기관 자체가 공격받지 않더라도 연결된 외부 업체 한 곳이 공격받으면 결제서비스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현금 없는 사회의 대표주자로 꼽혀온 북유럽 국가들은 최근 하나의 결제 방식에 의존하지 않는 체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현금 250덴마크크로네뿐 아니라 서로 다른 브랜드의 실물카드를 최소 2장 갖고, 모바일페이나 모바일뱅킹처럼 카드망을 거치지 않는 계좌이체 수단도 확보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스웨덴도 지난 7월부터 통신 장애가 발생해도 최대 7일간 오프라인으로 카드 결제를 할 수 있는 체계를 확대했다. 인터넷이 끊겨 카드사가 실시간으로 거래를 승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실물카드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식료품과 의약품, 연료 등 필수품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심각한 통신 장애와 사이버공격, 평시 위기뿐 아니라 국가 비상사태까지 대비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퇴장하던 현금, ‘결제 안전망’으로 재평가
퇴장하던 현금이 다시 돌아오는 흐름은 유로존 전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ECB가 지난달 발표한 조사에서 소매점과 식당·카페, 호텔 등 실제 영업장에서 결제를 받는 업체 가운데 현금을 받는다는 비율은 92%로 집계됐다. 같은 기준으로 산출한 2024년의 90%보다 2%포인트 늘었다. 코로나19 전후로 이어졌던 현금 수용률 감소세가 일단 멈췄다고 ECB는 평가했다.
그렇다고 유럽이 디지털 결제에서 다시 현금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실물카드 수용률도 2024년 87%에서 올해 88%로 올랐고, 모바일 결제를 받는 업체는 36%에서 68%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디지털 결제의 확산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업체들은 현금이 디지털 결제보다 특히 ‘신뢰성’과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필립 레인 유럽중앙은행(ECB)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1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거래에서 사용되는 지폐는 줄고 있지만 전체 지폐 보유량은 계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ECB는 일상적인 현금 사용은 감소하는 동시에 위기에 대비해 현금을 보유하려는 수요는 커지는 현상을 일종의 ‘역설’로 보고 있다. 디지털 결제가 일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수록 현금은 일상적인 결제수단에서 비상시를 위한 ‘결제 안전망’으로 역할이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