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소비의 중심이 TV와 OTT에서 유튜브로 이동하면서, 여행 유튜버들이 구축한 ‘즉흥 여행’ 문법이 방송 예능에도 빠르게 옮겨오고 있다.
여행지와 동선을 미리 정하기보다 현장에서 목적지를 고르고, 예상 밖의 변수와 로컬 경험을 즐기는 방식이다. 다만 방송 제작 환경에서는 사전 준비가 불가피한 만큼, ‘즉흥’이라는 표현의 범위를 둘러싼 진정성 논란도 커지고 있다.
대표 사례는 MBC ‘나 혼자 산다’의 전현무다. 전현무는 지난달 방송에서 공항에서 당일 목적지를 정한 뒤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떠나 29시간을 보내는 ‘무작정 여행기’를 선보였다. 방송은 여행지와 항공권을 현장에서 결정하는 즉흥성을 앞세웠지만, 이후 제작진이 촬영 가능성에 대비해 스태프 항공권을 미리 발권하고 현지 촬영 협조를 요청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제작진은 전현무가 목적지와 항공권을 사전에 정하지 않은 채 당일 여행을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즉흥 여행’이라고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시청자에게는 모든 과정이 사전 준비 없이 진행된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며 사과했다.
전현무는 MBN 새 예능 ‘디스이즈 현무로드’에서도 즉흥 여행의 연장선에 선다. 이 프로그램은 전현무와 배우 이준이 베트남과 일본을 돌며 직접 발품을 팔고, 현지인이 찾는 장소와 숨은 매력을 발굴하는 로드 트립 예능이다. 오는 20일 첫 방송을 앞둔 ‘디스이즈 현무로드’는 ‘레알 로컬’ 발굴을 표방하며, 정해진 관광 코스보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과 장소를 따라가는 여행 방식을 내세운다.
기존 연예인들의 유튜브 활동에서도 이 같은 흐름은 뚜렷하다. 코미디언 이상준은 유튜브를 통해 해외 맛집을 찾아다니며 현지 음식과 골목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하는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방송에서 구축한 캐릭터와 정돈된 여행 동선에서 벗어나, 유튜브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장비와 빠른 편집을 바탕으로 식당을 찾고 메뉴를 고르며 현지인과 만나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로 만든다.
유재석, 황정민, 양세찬, 지석진 등이 출연한 유튜브 예능 ‘풍향고’도 비슷하다. 출연진은 여행 과정에서 맛집과 지역 명소를 찾고, 이동 중 벌어지는 돌발 상황을 예능적 재미로 활용한다. 완성도 높은 관광 정보보다 출연자들의 반응과 관계, 우연히 발견한 장소, 즉석에서 바뀌는 선택이 콘텐츠의 핵심이 된다.
이 같은 변화는 여행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과거 TV 여행 예능이 해외 명소와 숙소, 음식점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면, 최근 시청자들은 검색으로 쉽게 찾기 어려운 동네의 분위기와 계획이 틀어지는 과정, 실패 가능성까지 포함한 현장 경험을 선호한다.
여행 유튜버들은 카메라를 켠 채 길을 묻고, 현지 추천을 받아 식당을 정하며, 예상 밖의 상황까지 영상에 담는다. 시청자들은 이 과정에서 대리 체험의 생동감과 함께 ‘나도 따라 할 수 있다’는 친밀감을 느낀다.
TV가 이 문법을 차용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여행 정보는 유튜브와 지도 서비스, 쇼트폼을 통해 빠르게 소비되는 반면, 방송은 연예인의 반응과 관계성, 제작 규모를 더해 차별화를 시도해야 한다.
즉흥 여행은 익숙한 스타에게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부여해 새로운 모습을 끌어낼 수 있고, 제한된 시간 안에 갈등과 해결, 발견의 서사를 만들기에도 유리하다.
다만 TV의 ‘즉흥’은 유튜브식 즉흥성과 동일하기 어렵다. 해외 촬영에는 출입국 일정과 항공권, 촬영 허가, 안전 관리, 현지 이동수단, 제작 인력 운영 등 사전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현무의 알마티 여행 논란도 이 같은 방송 제작 환경과 ‘즉흥’ 콘셉트가 충돌한 사례로 꼽힌다. 제작진의 설명처럼 전현무의 여행지 선택이 당일 이뤄졌더라도, 제작 시스템은 특정 가능성에 대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어디까지를 즉흥으로 볼 수 있는지를 시청자에게 명확히 설명하는 일이 관건이다.
이에 방송이 유튜브식 즉흥성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TV가 여행 유튜브가 만든 즉흥성의 매력을 차용할 수는 있지만, 사전 설계된 조건을 감춘 채 모든 과정을 ‘무계획’으로 포장하면 시청자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며 “유튜브식 여행 문법이 방송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을수록 리얼리티의 기준을 더 투명하게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