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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역수출’의 길을 연 김상철 [종교칼럼]

한국 종교의 서구 ‘역수출’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시대에 일어났다. 1950년대 한국은 서구 선교사에게 복음을 배우고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던 전쟁의 폐허 위에 있었다. 그런 때 서울의 작은 집에서 출발한 통일교가 창립 5년 만에 미국 선교에 나선 것이다. 돈도 조직도 변변치 않았던 신생 교회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세계적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그 길목에는 공직에 몸담으면서 해외 선교의 문을 연 김상철이 있었다.

 

1915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철은 연희전문학교 영문과(현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공직에 몸담았다. 6·25전쟁 당시에는 재무부 국고지출관으로 전주에서 근무했다. 인민군이 밀려오자 국군과 피란민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그는 남원 인근에서 뜻밖의 영적 체험을 했다. 자색 옷을 입은 노인이 환상에 나타나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르지 말고 산기슭의 청룡사에 머물라고 했다. 그 말에 따라 그는 청룡사에 몸을 숨겼다. 뒤늦게 들으니 함께 남하하던 사람들은 죽거나 붙잡혔다고 했다. 인민군 보안서원들이 사찰까지 찾아와 바로 앞을 지나면서도 그를 발견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김상철은 이를 영계의 보호로 받아들였다. 목숨을 건지면 남은 생애를 인류를 위해 바치겠다는 서원도 세웠다. 훗날의 선교 사명은 이때 이미 그의 내면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김상철은 1954년 5월 문선명 총재와 유효원·이창환·유효민·박정화 등과 함께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창립에 참여한 초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영문 전도지를 만들고 원리 말씀을 영어로 옮기는 일에도 힘을 보탰다. 그에게는 ‘다윗’이라는 이름과 함께 해외 개척선교사의 사명이 있다는 영적 메시지도 주어졌다고 한다.

 

그해 8월 뜻밖의 길이 열렸다. 유엔 개발원조 프로그램에 따라 정부가 선발한 공무원 연수생 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영국에 가게 된 것이다. 그는 웨일스대학교에서 사회정책과 후생을 연구하는 공식 일정을 수행하고, 여가에는 개인 자격으로 현지 기성교회를 찾아 통일교의 가르침을 알렸다. 당시 세계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참혹한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였고, 서구의 원조와 선교가 필요한 땅이었다. 그런 때 한국인 공무원이 영국에 건너가 한국에서 태동한 새로운 신앙과 사상을 알린 것이다. 서구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한국이 이제는 자신이 해석하고 체계화한 종교사상을 서구에 전한, 말하자면 ‘신앙의 역수출’이었다.

 

1955년 김상철은 웨일스에서 열린 국제사도교회 연차대회 연단에도 섰다. 세계 각국의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 등 300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당초 10분으로 예정됐던 그의 연설은 25분간 이어졌다. 그는 문선명 총재를 중심으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기독교운동과 원리 말씀을 소개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 있는 한국에도 세계를 향해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그의 연설을 계기로 사도교회는 이듬해 여호수아 맥케이브 목사를 한국에 파견했다. 맥케이브 목사는 80일간 머물며 통일원리를 공부하고 영문 번역도 도왔다. 비록 두 교단의 공식 제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서구 교회 인사가 한국을 찾아와 한국에서 시작된 신앙을 장기간 연구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한국인이 서양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웠다면, 이제는 서양 목사가 한국을 찾아와 한국에서 체계화된 종교사상을 공부한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와 한동안 외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이어가던 김상철은 1959년 가슴에 품어온 선교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미국 서부 지역을 맡아 1960년 오리건주에 성 헬렌스 통일교회와 성경연구회를 세웠다. 1961년 말부터는 ‘새 시대를 위한 새소식’을 주제로 심령대부흥회를 열었고, 1962년에는 시애틀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해 포틀랜드에서 시카고까지 11개 주를 도는 40일 순회전도에도 나섰다. 자동차로 미 대륙의 3분의 2 이상을 달리는 강행군이었다. 1964년에는 약 3000마일을 달려 시카고에 교회를 세웠다. 일행은 경비를 아끼려고 모텔 대신 천막과 자동차, 공원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미국 곳곳에 한국에서 출발한 종교의 이름을 알렸다.

 

초기 통일교의 성장은 원리라는 교리체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김상철의 증언 곳곳에는 환상과 계시, 기도와 영적 체험이 등장한다. 당시 신도들에게 원리와 신령 역사는 신앙을 움직이는 두 축이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는 확신이 방향을 제시했다면, 영적 체험은 낯선 땅에서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됐다. 1972년 문 총재가 미국 활동을 본격화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앞서간 선교사들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다. 김상철은 이후 국제기동부흥단과 초교파운동, 국제구호사업에 참여했고 1975년에는 통일신학대학원 원장을 맡아 세계에서 활동할 인재를 길러냈다.

 

지금은 한국의 종교와 문화가 세계로 진출하는 일이 낯설지 않지만, 1950년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공직자였던 김상철은 원조를 받던 한국에서 서구로 신앙을 전했고, 그가 영국과 미국에 뿌린 작은 씨앗은 훗날 통일교의 세계적 기반으로 자라났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세계를 향해 먼저 길을 떠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정성수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