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시내에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국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 담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으로 재직한 기간(1933년 3월∼1945년 4월) 동안 단 한 번도 영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기념물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처칠과 루스벨트 두 지도자를 통해 2차대전 기간 맺어진 영·미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2차대전 종전 후 수십년간 영국과 미국의 친밀한 사이는 일명 ‘특수 관계’(Special Relationship)로 불렸다.
동맹을 경시하며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처칠이 아니다”고 말했다. 몰래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진 이란을 공습하기 직전 영국에 공군 기지 제공 등을 요청했으나 거부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영국 정부가 과거 처칠이 총리이던 시절만큼 미국 정부에 협조적이지 않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영국이 어리석고 매우 부적절하게 행동했다”고 일갈한 트럼프는 당시 키어 스타머 총리를 겨냥해 “미·영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꼭 그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스타머는 결국 취임 후 2년 만에 물러났다. 후임자인 앤디 버넘 총리는 조만간 백악관에서 트럼프와 대좌(對坐)할 예정이다.
1982년 4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포클랜드 제도(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제도) 영유권을 놓고 두 나라가 전쟁에 돌입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둘 다 미국의 동맹이다. 당시 미국은 ‘특수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 편을 들었다. 그런데 44년 만에 미국 정부의 기류가 바뀌었다. 트럼프는 ‘영국·아르헨티나 간에 또 전쟁이 일어나면 예전처럼 영국을 지원하겠느냐’는 질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 “영국은 이란 전쟁에서 미국을 돕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에 잔뜩 고무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 영토 일부”라며 “이 섬들을 되찾아야 한다”고 외쳤다.
영국 영토인 그레이트브리튼 섬 옆에 있는 아일랜드 섬은 독립국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北)아일랜드로 나뉘어져 있다. 20세기 초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 친(親)영국 성향 주민들이 많은 섬의 북부 지역은 영국 잔류를 택한 결과다. 그런데 12일 아일랜드를 방문한 트럼프가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아일랜드 통일은 환상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북아일랜드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와 합쳐야 한다는 뜻이니 영국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하다. 트럼프 이전 그 어느 미국 대통령도 이런 ‘내정 간섭’을 한 적이 없다. 영국은 정부는 물론 정치인들, 심지어 언론까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차대전 산물인 ‘미·영 특수 관계’는 진작 종말을 고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