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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감속'에 복잡해진 한국 셈법… 기회냐 새 장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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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업계 "위험 수준 따라 차등 접근"… 검증 역량은 기회
정부도 선택의 기로… 국제 공조·산업 육성 병행 필요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을 이끄는 빅테크 수장들이 잇달아 AI 개발 속도 조절론을 꺼내 들면서 우리나라 AI 산업에도 새로운 셈법을 요구하고 있다.

안전성과 신뢰성이 AI 경쟁의 핵심 기준으로 떠오르면 후발주자인 국내 기업에는 검증 역량을 경쟁력으로 키울 기회가 될 수 있지만, 빅테크가 주도한 안전 기준이 국제 규범으로 굳어질 경우 또 다른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서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AFP연합뉴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AFP연합뉴스

국내 업계에서는 일률적인 감속보다 AI의 활용 분야와 위험 수준에 따른 차등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 역시 국제적인 AI 안전 규범 설계에는 적극 참여하면서 제조·산업 현장 등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실용 AI의 경쟁력을 키우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안전이 속도 따라가야"…빅테크가 꺼낸 'AI 브레이크'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2일(현지시간) 개인 블로그에 AI가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발전하는 '재귀적 자기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 단계에 진입했다며 "프론티어 AI 모델의 개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구체적인 해법으로는 AI 기업 내부에 안전 평가를 위한 제3자를 상주시켜 개발 과정에 참여시키는 '상주 평가자' 제도를 도입하고, 민주주의 국가 간 공동 안전 기준을 마련한 뒤 장기적으로 글로벌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3단계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이 같은 주장에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일론 머스크 xAI CEO,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도 동조하면서 미국 빅테크를 중심으로 AI 개발 속도 조절론이 빠르게 확산하는 분위기다.

◇ 추격 기회냐 새 진입장벽이냐…한국 AI 업계 엇갈린 셈법

국내 AI 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속도 조절의 대상과 범위다.

속도 조절론 자체는 단순한 AI 개발 중단이 아니라 안전성 검증 체계를 갖추자는데 방점이 찍혀 있어, 향후 국제적 안전 기준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 국내 기업에 미칠 영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아모데이 CEO의 제안처럼 민주주의 국가 간 공동 기준 수립과 글로벌 공조가 현실화하고, 빅테크가 주도하는 안전 기준이 국제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 국내 기업에도 이를 충족해야 하는 부담이 생길 수 있다.

국내 AI 업계 한 관계자는 "자본력·인재·컴퓨팅 파워 모든 면에서 글로벌 빅테크 대비 이미 열세인데, 상시 평가를 비롯해 각종 의무 요건이 추가된다면 사실상 진입 장벽을 제도화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속도 자체를 획일적 기준으로 적용하기보다 모델의 활용 맥락과 위험 수준에 따라 차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짚었다.

반대로 안전성과 신뢰성이 AI 경쟁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국내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얼마나 빠르게' 개발하느냐보다 '얼마나 믿을 수 있게' 개발하고 활용하느냐가 중요해지면 안전성 검증 역량 자체가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정주 코난테크놀로지 AI연구소장은 "프론티어 모델을 쓰는 쪽에서 '독립 기관의 검증'을 도입 조건으로 내세우면, 한국 기업에는 규제 압력이 아니라 검증 역량의 경쟁이 될 것"이라며 "그 시간에 검증 자산을 쌓지 못해 남의 검증 결과를 사오는 시장이 되는 것이 진짜 규제 압력의 형태"라고 진단했다.

한국이 빅테크와 같은 속도로 범용 인공일반지능(AGI) 개발 경쟁을 벌이기보다 자체적인 강점을 살려 다른 방식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최병호 고려대 AI연구소 교수는 "빅테크 모델은 파라미터 수가 10조개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국내 모델은 아직 1조개를 넘지 않아 서로 직면한 현실과 입장이 다르다"며 "AGI 성능 추격은 장기 과제로 두되 단기적으로는 한국의 강점을 살린 제조 AX 특화 모델 등에 집중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 국제 규범 참여하되 산업 육성 계속…정부 '투트랙' 과제

AI 개발 속도 조절론이 국제적인 안전 규범 논의로 확대되면 정부의 전략적 판단도 한층 중요해질 전망이다.

미국은 이미 반도체 수출 통제 과정에서 안보 동맹과 첨단 기술 거버넌스를 연계해 왔다. 이에 따라 AI 안전 분야에서도 동맹국을 중심으로 공동 대응을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아모데이 CEO가 인정했듯 중국이 참여하지 않는 속도 조절은 서방 진영만의 자기 제약에 그칠 수 있다. 한국 기업 역시 중국 시장과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끊기 어려운 만큼 국제 공조의 범위와 수위를 신중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김진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교수는 "AI가 인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타당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AI 개발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개발을 전면 중단할 수도 없는 난제"라며 "기술 개발과 활용을 신속하게 진행하되 잠재적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한국은 추격 국가 입장에서 빅테크를 따라 전면 중단하기도 어렵고, 독자적으로 계속 추진하다 국제적 비난을 살 수도 있다"며 "범용 AGI 개발에 매달리기보다는 개별 기업의 당면 과제나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AI 개발을 추진하는 유연하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내 업계에서는 국제적인 AI 안전 표준 마련에는 적극 참여하되 국내 산업 육성 기조는 유지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AI 안전 담론과 규범이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는 만들어진 규칙을 수용하는 쪽이 아니라 설계에 참여하는 쪽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며 "규범 설계 단계부터 다양한 규모의 기업, 개발자 및 연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