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첫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장에 “전문성 안 보여”… 예술계, 선임 철회 촉구

‘뒷것’을 자처하며 평생 예술에 헌신한 김민기 학전 대표가 그중에서도 애정을 쏟아 일군 분야가 어린이극이다. 김 대표는 생전 “우리나라 교육환경에는 입시경쟁과 소모적인 오락만 존재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숨통을 터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전은 이런 철학에 따라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등을 꾸준히 제작했다.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임명 철회 요구 성명서. 아시테지 코리아 제공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임명 철회 요구 성명서. 아시테지 코리아 제공

어린이극은 일반 연극을 작게 줄인 장르가 아니다. 영아부터 청소년까지 성장 단계와 감각, 정서와 관람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어린이를 가르치거나 보호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문화적 권리를 지닌 관객으로 대하는 철학도 필요하다.

 

그런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계가 지금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부가 초대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에 해당 분야 전문성이 확인되지 않는 인사를 임명했다는 비판이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인 아시테지 코리아는 14일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선임 철회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국인형극협회와 한국극작가협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등 8개 협회를 비롯해 개인 200명과 단체 132곳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어린이·청소년의 미래를 위한 예술 창작 전문성을 이렇게 가볍게 여겨도 되느냐”며 문화체육관광부에 어연선 단장 겸 예술감독 임명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은 2011년 국립극단 안에 설치된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 출발했다. 연구와 창작, 작품 개발과 관객 연구를 이어오다 전문성을 높이고 학교·지역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2025년 별도 극단으로 분리·개편됐다. 독립 극단이 지향할 미학과 창작 방향을 처음 세운다는 점에서 초대 예술감독 선임에 현장 관심이 컸다.

 

문체부는 지난 11일 어연선 전 광명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임기 3년인 초대 단장 겸 예술감독에 임명했다. 어 신임 감독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연극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극단 ‘현장’ 대표를 거쳐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팀장과 예술단협력팀 부장, 광명문화재단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문체부는 그를 공연 연출가이자 예술행정 전문가로 소개했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어 감독이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수 어린이·청소년극을 개발하고 극단 성장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체부가 공개한 주요 이력에는 어린이·청소년 공연을 창작하거나 관련 기관을 이끈 경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성명 참여자들은 영유아와 어린이, 청소년은 물론 장애 어린이·청소년까지 서로 다른 발달 단계와 감각을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이 연극뿐 아니라 무용과 인형극, 신체극, 음악과 서커스까지 포괄하는 독립된 전문 영역이라는 설명이다.

 

이들은 예술감독이 단순히 조직을 관리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작품과 창작자를 선택하고 극단 미학과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인 만큼 일반 공연예술 경력이나 행정 경험만으로 어린이·청소년극 전문성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년 7월부터 8월 초까지 수원과 서울에서는 세계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인이 모이는 제22회 아시테지 세계총회와 공연예술축제가 열린다. 성명 참여자들은 국제사회에 한국 어린이·청소년극의 성취를 보여줘야 할 시점에 국립극단 수장에게 요구되는 기본 전문성을 다시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문제 제기는 특정 개인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며 “국가가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을 독립된 전문 예술영역으로 인정하는지를 묻는 문제”라고 했다. 이들은 임명이 철회될 때까지 연대 서명과 시민 호소 등 행동을 이어갈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