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4일 오전 11시.
평소라면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사무실 곳곳에서 테니스 중계가 켜졌다. 직장인들은 업무시간에 몰래 휴대폰으로 호주오픈 8강전을 봤고, 포털에는 테니스 규칙을 묻는 검색이 이어졌다.
SNS에는 ‘#보고있나’가 도배됐다. 경기 뒤 한 선수가 카메라 렌즈에 적어 놓은 한마디에서 시작된 열풍이었다. 하루 만에 응원 게시글은 1만 8000건을 넘었다. 그가 경기에서 쓰던 안경까지 불티나게 팔렸다.
언론은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정현 신드롬’.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테니스 팬들에게나 익숙했던 스물한 살 선수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츠 스타가 돼 있었다.
조코비치를 무너뜨리다
정현 신드롬의 시작은 2018년 호주오픈 16강전이었다. 상대는 노바크 조코비치. 당시 호주오픈에서만 여섯 번 정상에 오른 선수였다.
조코비치가 공을 코트 구석으로 보내면 정현이 쫓아가 받아냈다. 다시 반대쪽으로 보내도 공이 돌아왔다. 긴 랠리가 이어질수록 먼저 실수하는 쪽은 오히려 조코비치였다.
경기는 세 세트 만에 끝났다.
7-6, 7-5, 7-6.
조코비치의 완패였다.
경기를 마친 정현은 중계 카메라로 다가가 렌즈에 짧은 글을 적었다. ‘보고 있나.’ 소속팀이 해체되며 코트를 떠난 스승을 향한 인사였다.
이어 정현은 8강전에서도 승리하며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올랐다.
결승까지 한 경기. 상대는 로저 페더러였다.
이번에는 정현의 발이 버티지 못했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터져 살이 벗겨져 있었다. 결국 두 번째 세트 도중 기권했다.
우승 도전은 끝났지만 그해 정현의 세계랭킹은 19위까지 치솟았다. 한국 남자 선수 역대 최고 순위였다.
세계 19위에서 1000위 밖으로
정점을 찍은 뒤 정현은 코트에서 자주 보이지 않았다. 부상 때문이었다.
발목과 발바닥에 이어 허리와 손바닥까지 잇따라 다쳤다. 재활해서 돌아오면 다시 아팠다. 2021년에는 허리 수술까지 받았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사이 랭킹도 계속 떨어졌다. 2024년 가을, 세계랭킹은 1473위까지 내려갔다.
하루 1만 8000건의 응원 게시글이 쏟아졌던 이름이 몇 년 뒤에는 세계랭킹표에서도 찾기 어려운 이름이 됐다.
다시 시작하려면 처음부터 올라가야 했다. 2024년 9월 정현은 일본에서 다시 코트에 섰다. 무대는 ATP 투어도, 챌린저도 아닌 ITF 월드테니스투어. 이제 막 프로에 뛰어든 선수들이 첫 포인트를 쌓는 곳이었다.
조금씩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5년여 만에 우승하는 등 그해 ITF에서만 세 차례 정상에 올랐다.
쌓인 포인트로 정현은 한 단계 위 챌린저 투어로 올라섰다. 4월 부산오픈 챌린저에서는 8강까지 올랐다. 정현은 전성기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경험을 몸이 기억하지 않나. 자연스럽게 그 경험들이 나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다시 한국의 ‘마지막 주자’로
지난해 9월 강원 춘천.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남자 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서 맞붙었다. 데이비스컵은 테니스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대회다.
승부는 마지막 단식까지 갔다. 정현은 한국의 마지막 주자로 나섰다. 한 세트에서는 게임스코어 1-5까지 몰렸지만 끝내 경기를 뒤집었다.
올해 2월 부산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전에서도 마지막 단식을 맡았다. 정현이 승리하면서 한국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경기 뒤 정현은 팬들 이야기를 꺼내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해 춘천에 이어 부산에도 많은 팬들이 찾아와 주셔서….”
잠시 감정을 추스른 정현은 “팬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8년 전 온 국민의 응원을 받았던 정현이었다. 긴 부상과 재활을 거쳐 돌아온 뒤에도 관중석에는 그를 기다렸던 팬들이 있었다.
한국은 18일과 19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인도와 마지막 관문을 치른다. 이 경기를 이기면 곧바로 세계 8강, 8개국이 겨루는 파이널스에 오른다. 한국 테니스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무대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스물한 살은 서른이 됐다. 세계 19위도, 이름이 사라지던 시간도 지나왔다.
‘보고 있나.’ 8년 전 그 한마디의 주인공이 다시 코트에 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