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지하철 5·6호선 청구역 승강장에서는 각 출구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안내표지가 눈에 띄었다. 환승 노선과 엘리베이터 설치 위치를 방향과 남은 거리로 표시해 이용자가 현재 위치에서 목적지까지의 이동 경로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승객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변화일 수 있지만, 휠체어 이용자 등 교통약자에게는 자신이 갈 수 있는 경로를 미리 판단하고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정보라 할 수 있다.
20일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서울지하철은 24개 노선, 600개 이상의 역으로 구성된 대규모 다중 환승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역마다 통로 형태와 분기 구조, 층간 연결 방식이 달라 특정 역에서의 환승 경험을 다른 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기존 안내체계는 출입구와 통로, 엘리베이터 등 개별 시설 단위로 정보를 제공했다. 엘리베이터로 역사 내에서 수직 이동을 해야 하는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이동 중 안내가 끊기거나 엘리베이터와의 거리·층수·방면 등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면 혼란을 겪거나 잘못된 경로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안내표지의 높이도 문제였다. 공사에 따르면 기존 안내표지는 서 있는 성인의 평균 눈높이인 150~165㎝를 기준으로 설치됐지만, 휠체어 이용자의 앉은 눈높이는 평균 120~130㎝로 이보다 30~40㎝가량 낮다.
서울교통공사의 ‘모두의 지하철을 위한 안내표지 개선사업’은 교통약자의 실제 이동경로를 기준으로 안내체계를 다시 구성했다는 의미가 있다. 휠체어 이용자가 하차 직후 바로 인지할 수 있는 벽면과 기둥을 우선 활용하고, 이동 경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을 중심으로 안내표지를 배치했다.
기존 시설물이나 광고판 때문에 권장 위치에 설치하기 어려울 때는 이동 경로에서 가장 가까운 설치 가능 지점을 대체 위치로 정했다. 기존 안내표지를 없애기보다 필요한 지점에 표지를 신설·보강해 서 있는 이용자와 앉은 이용자가 각자의 시야에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변화는 교통약자의 실제 이동시간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교통공사가 시청역 1·2호선 환승구간에서 휠체어 사용자와 유아차 동반자, 고령자 등 3개 그룹별 5명씩 총 15명을 대상으로 1대1 관찰조사를 실시한 결과, 환승구간의 평균 환승시간은 개선 전 총 16분3초에서 개선 후 9분37초로 6분26초, 약 40% 줄었다.
특히 휠체어 이용자 그룹의 개선이 두드러졌다. 공사는 휠체어 이용자가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를 수직 이동의 필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안내표지 개선에 따른 환경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체감했다면서, 환승시간 단축과 전반적인 만족도가 다른 그룹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세계일보에 설명했다.
안내표지는 이동 시간 단축뿐 아니라 잘못된 이동을 막는 역할도 했다. 전동휠체어나 유아차 이용객이 엘리베이터 없는 개찰구로 가려다 개선된 안내표지를 보고 이동을 멈춘 사례가 확인됐는데, 공사는 개선한 안내표지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수행한 사례로 판단했다.
이번 사업은 서울교통공사와 현대로템·서울시·사단법인 무의가 힘을 모았다. 서울시가 기관 간 협력지원체계를 마련하고 공공디자인 가이드라인 반영을 추진했으며, 현대로템이 9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지원했다. 사단법인 무의는 교통약자가 직접 참여한 현황조사와 이용행태 분석을 바탕으로 표준디자인을 연구·개발하고 안내표지 제작과 설치, 하자보수를 맡았다. 2025년 4월 업무협약을 거쳐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공사는 교통약자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승역에 초점을 두고 설치 장소를 결정했다. 환승역 개수와 혼잡도, 승객 이용량과 교통약자 비율, 교통약자 이용량, 환승거리, 엘리베이터 수와 휠체어 리프트 유무, 지상 노출 환승 동선 등 역사별 특성을 종합 분석했다. 표지는 시청역과 서울역, 고속터미널역, 삼각지역, 건대입구역, 교대역, 노원역, 연신내역, 천호역 그리고 청구역에 설치했다.
공사는 올해 하반기 안내표지 설치 역을 25개로 늘린 뒤 내년까지 전 역사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추가 예산도 현대로템과 협의를 통해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
공사 관계자는 “공급자 중심 안내체계에서 벗어나 교통약자가 겪는 어려움을 듣고 사업 추진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한 수요자 중심의 안내체계 개선 사례라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와 자립성을 높이는 측면에서 긍정적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교통약자 지하철 이용의 물리·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자유로운 이동과 사회 참여 기회 등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