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 완료 발표는 반도체 회사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뉴스였다. 사람들은 6세대 10나노급 D램 개발 완료와 같은 뉴스를 보면 ‘반도체 회사의 기술력이 또 한 번 올라갔다’고 생각했고, 제품들이 곧 양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예전과는 다른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2023년 말, 삼성전자는 HBM3E 제품 개발 완료를 발표했으나 2024년 내내 주요 고객사에 제품을 공급하는 데 실패해 큰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사실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개발 완료는 반도체 회사의 선언일 뿐이고, 구매 결정은 고객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객은 구매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살짝 바꿔 봐야 한다. 어째서 과거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준(Standard)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표준은 제품 제조사와 사용자 사이의 일련의 약속을 의미한다. 표준의 쉬운 예가 220V 출력 전압이다. 가전제품 회사는 220V에서 가동되는 가전제품을 만들고, 건설회사는 콘센트에서 220V 전압이 출력되는 건물을 짓는다. 표준의 힘은 막강하다. 모든 주택에 동일한 모양의 콘센트가 있고 동일한 출력 전압을 지원하므로, 가전제품 회사도 제품 개발이 편해지고 소비자도 제품을 구매할 때 동작 전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표준 제품이다. ‘DDR5 메모리’라는 제품은 실제로는 ‘DDR5 표준을 만족하는 메모리 반도체 제품’을 의미한다. DDR5를 지원하도록 만들어진 컴퓨터는 어떤 회사의 DDR5 메모리를 구해도 동작한다. 제조사별로 효율성, 속도 등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메모리 제조사는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표준 위에서 경쟁해 왔다. 그래서 개발이 완료 뒤 양산하면 누군가에게는 판매할 수 있었다. 일단 장착하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변화하게 된다. AI 혁신의 주역 중 하나는 HBM이라는 메모리 표준 제품이다. 그런데 AI 열풍 시작 시점에 HBM의 전 세계 수요 대부분을 엔비디아 한 회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엔비디아의 의지가 제품의 표준 준수 여부보다 판매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HBM 표준이 100의 성능을 요구해서 반도체 회사가 이에 맞춰 제품을 개발했는데, 엔비디아가 110의 성능을 요구하면 제품을 판매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과거 DDR5와 같은 제품이라면 다른 회사에 판매할 수 있겠지만, HBM의 경우 엔비디아가 세계 수요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팔 수 없었다. 게다가 반도체 제조 기술이 점점 더 어려워져 뒤늦게 고객의 의중을 알아채도 개발 방향을 바꾸는 것이 힘들어졌다.
제조 기술이 어려워질수록 메모리 회사는 고객 의견을 제품 개발 초반에 반영해야 한다. 고객 역시 메모리 회사가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비즈니스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메모리 회사, AI 반도체 회사와 IT 대기업의 파트너십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표준 중심의 경쟁에서, 표준 뒤에 숨겨진 고객의 의도까지 파악해야만 하는 방향으로 경쟁의 방향이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표준 제품을 개발 완료했음에도 즉시 양산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언어는 역사성이 있고, 역사성 뒤에는 거대한 사회 변화의 흐름이 있다. 그래서 첨단 과학기술 용어도 역사성을 피해 갈 수는 없다. AI의 등장과 제조의 어려움이라는 파도가 닥쳐오자 ‘개발 완료’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중요한 것은 ‘개발 완료’의 의미가 바뀐 것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단어의 의미 변화 뒤에 숨겨진 거대한 사회 변화의 흐름을 읽는 것이다. 이번 변화는 결국 반도체 제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AI가 요구하는 성능은 계속 높아지는 거대한 흐름이 있었기에 발생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변화의 빈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정인성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