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 위자료 인정액이 경제 수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십수년째 그대로 유지되며 피해자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크다. 위자료 현실화를 위해선 양형기준처럼 현재 사회·경제적 수준에 맞게 조정한 ‘위자료 산정기준표’가 마련돼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당사자와 대리인이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위자료 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안좌진 (사법연수원 38기) 전주지법 부장판사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위자료 현실화를 위한 토론회’에서 “위자료 인정액 실질화를 위해선 ‘위자료 산정기준 표’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밝혔다.
법원 손해배상실무연구회 간사를 맡고 있는 안 부장판사는 “낮은 위자료 액수는 피해가 발생해 법률적으로는 민사적 구제가 분명히 필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승소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적절한 전보수준에 편저하게 미치지 못해 결국 당사자가 법률적 구제수단에 호소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를 발생시키고 있다”며 “당사자들이 민사법원보다는 형사적 구제수단에 의존하게 만드는 왜곡된 현상을 불러왔다”고 짚었다.
안 부장판사는 ‘법원이 위자료를 정하는 데 무엇을 참고 요소로 삼는지 알 수 없다는 비판’에 대해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법관이 위자료 산정 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유사 사건 판결에서 정해진 위자료’인데, 이를 판결문에 ‘산정 이유’로 적는 것은 사실 어색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에 자세하게 설시하지 않는 것”이라며 “추후 형사사건에서의 양형기준과 유사한 위자료 양정기준표가 마련된다면 이러한 문제들이 크게 해소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법원 손해배상실무연구회는 ‘위자료 산정방식 개선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도 지난해 11월 ‘위자료 산정 방식 개선을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해당 연구 결과에는 위자료 산정기준 초안도 담길 예정이다.
정의진(변호사시험 5회)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제 발표에서 “법원은 2015년 사망 기준 위자료 기준 금액을 1억원으로 상향했으나 그 금액은 11년간 조정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며 “그 사이 경제 규모와 물가에는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고, 위자료 수준을 외부에서 평가할 준거를 제공할 수 있는 경제학, 보건학, 심리학 등 분야에서 실증연구도 국내에 상당히 축적됐다”며 위자료 실질화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법원은 위자료 액수가 낮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2016년 ‘불법행위 유형벌 적정한 위자료 산정방안’을 마련해 법관들에게 권고 기준을 제시했다.
△교통사고 1억원 △대형재난사고 2억원 △영리적 불법행위 3억원으로 기준 금액을 정하고, 특별가중 요인이 있을 경우 최대 2배까지 가중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영리적 불법행위로 생명침해가 이뤄진 경우 위자료는 최대 9억원까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는 대체로 1억원 이하로 인정되고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분석이다.
우리나라의 위자료 액수는 일본, 미국 등 주요국과 비교해서도 낮은 수준이다.
사지마비 피해자에게 인정되는 위자료 액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1억원 이하 수준인 반면, 일본은 2800만엔(약 2억8000만원), 미국은 872만 달러(약 120억6700만원)에 이른다. 영국은 42만 파운드(약 7억7800만원), 프랑스 56만 유로(약 8억8900만원), 독일도 40만 유로 수준이다.
정 교수는 “일본도 1970년까지 인신손해에 대한 위자료가 서구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법원이 법관의 재량을 제한하는 통제 법리를 정립하고 액수를 점차 고액으로 정액화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비재산적 손해배상을 단순히 신체·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에 한정하지 않고 신체적·정신적 침해로 인해 발생한 일상의 안온함과 삶의 즐거움의 박탈 등을 여러 유형으로 규범화해 위자료 산정에 반영하고 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법원이 양형 기준과 유사한 위자료 산정기준 시스템을 마련하고 이를 주기적으로 검토해 사회적 변화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토론자로 나선 박동진 연세대 법전원 교수는 “대법원에 양형위원회를 설치해 양형기준을 설정하고 제시하는 것은 각각의 재판에서 양형 편차와 법관의 자의성을 완화하고, 양형의 예측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함”이라며 “법적 구속력은 없는 권고적 기준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재판부가 양형기준을 사실상 공유함으로써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자료의 경우에도 지속가능한 위자료 산정기준을 제시할 때 당사자에게 예측가능성과 판결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위자료 현실화는 기준금액을 현 시점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맞게 조정하는 것과 함께 피해자가 자신의 비재산적 손해를 충분히 주장하고 법원이 이를 구체적으로 심리·설명할 수 있도록 재판절차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한 번 정해진 기준이 다시 장기간 고정되지 않도록 판례와 경제·사회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반영해 산정기준을 정기적으로 검토·갱신하는 체계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번 토론회는 대한변호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 김동아 의원실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원조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 한국총괄대표가 토론회 좌장을 맡았으며, 토론에는 안 부장판사와 박 교수 외에도 한경석 국회입법조사관과 이용명 변호사, 이태준 시사저널 기자가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