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수치가 정상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미뤄왔던 만성 B형간염 환자들의 치료 전략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간 수치뿐 아니라 혈액 속 B형간염 바이러스량을 주요 치료 기준으로 삼아 간암과 간경변 위험을 조기에 낮추는 방향으로 진료지침이 바뀌면서 중등도바이러스혈증 환자도 주요 치료 대상에 포함됐다.
따라서 별다른 증상이 없는 중등도바이러스혈증 환자도 정기적인 검사와 필요시 치료를 통해 간 손상과 간암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 ‘간 수치 정상’만으로 안심 못해…바이러스량 따라 치료 달라진다
21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간학회는 올해 개정한 ‘2026 만성 B형간염 진료 가이드라인’에서 만성 B형간염을 기존의 ‘염증성 간질환’이 아닌 ‘바이러스 감염 질환’으로 재정의하고, 치료 판단의 중심을 간수치(ALT)에서 혈중 B형간염 바이러스 DNA(HBV DNA) 수치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간수치가 정상이면 경과를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던 ‘중등도바이러스혈증’ 환자도 주요 치료 대상에 포함됐다.
중등도바이러스혈증은 혈중 HBV DNA가 2000 IU/mL 이상 10⁸ IU/mL 이하인 상태로, 개정 지침은 이 범위에 해당하면 ALT 수치와 관계없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시작하도록 권고한다.
그동안 간 수치는 B형간염 환자의 항바이러스 치료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간 수치가 정상이더라도 체내 B형간염 바이러스량이 많으면 간 손상 및 간암 위험이 높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치료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유정주 순천향대 부천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최근 만성 B형 간염은 간에 염증 발생 이후 치료하는 것에서 벗어나 바이러스 증식을 일찍 억제해 간경변과 간암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 증상 없어도 진행되는 B형간염…‘중등도바이러스혈증’도 관리 대상
B형간염은 B형간염 바이러스가 간세포에 감염돼 발생한다. 성인이 급성으로 감염되면 대부분 자연적으로 회복하지만 신생아·영유아기에 감염되거나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감염되면 바이러스가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만성 B형간염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성화되면 간에 염증과 섬유화가 서서히 진행돼 간경변, 간부전, 간세포암으로 악화될 수 있다.
국내 만성 B형간염 환자는 약 120만명으로 추정된다. 진단율은 약 83%로 높은 편이지만 실제 치료를 받는 비율은 22.2%에 그쳐 진단과 치료 사이에 격차가 있다. 국내 간암 사망자의 상당수가 B형간염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조기 진단과 관리가 중요하다.
B형간염은 급성 감염 시 피로감, 식욕부진, 미열, 구역감, 황달, 짙은 소변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만성 B형간염은 간 손상이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특별한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감염 경로는 감염된 산모에게서 아이로 전파되는 수직감염이다. 이밖에 수혈, 오염된 주사기, 침습적 시술, 성 접촉, 가족 간 혈액 및 체액 노출 등을 통해 감염될 수 있다. 반면 일상적인 식사나 포옹, 재채기 등 단순한 접촉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이번 진료지침 개정의 핵심은 혈중 바이러스량에 따라 만성 B형간염의 자연경과를 구분하고 치료 대상을 넓힌 것이다. 개정 지침은 HBV DNA 10⁸ IU/mL 초과를 고바이러스혈증, 2000 IU/mL 이상 10⁸ IU/mL 이하를 중등도바이러스혈증, 2000 IU/mL 미만을 저바이러스혈증으로 구분한다.
특히 중등도바이러스혈증은 간수치가 정상이어도 간암과 간섬유화 위험이 높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반영됐다. 대한간학회는 국내외 코호트 연구와 메타분석 등을 근거로 이 환자군을 간질환 진행과 간암 발생 위험이 높은 집단으로 보고 항바이러스 치료를 권고했다.
최근에는 조기 항바이러스 치료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임상시험 결과도 나왔다. 간경변증이 없는 중등도바이러스혈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ATTENTION 연구 중간 분석에서는 항바이러스 치료군이 관찰군보다 간암, 비대상성 간질환, 간이식 또는 사망 등을 포함한 중증 임상사건 발생 위험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 항바이러스제로 억제하고 정기검사로 추적…가족도 검사 필요
HBV DNA가 2000 IU/mL 미만으로 낮은 저바이러스혈증 환자는 간경변증 등 간 손상 정도를 평가한 뒤 정기적으로 추적 관찰할 수 있다. 반면 간경변증이 있거나 다른 위험인자가 있는 경우에는 바이러스량과 간수치 등을 종합해 치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만성 B형간염의 표준 치료에는 테노포비어, 엔테카비르 등 경구 항바이러스제가 사용된다. 현재 치료의 목표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보다는 HBV DNA를 장기간 억제해 간의 염증과 섬유화 진행을 막고 간경변과 간암으로의 진행 위험을 낮추는 데 있다.
항바이러스제로 바이러스가 억제되더라도 이미 간섬유화나 간경변이 진행된 환자는 간암 위험이 남을 수 있다. 따라서 만성 B형간염 환자는 정기적인 간암 감시검사를 받아야 한다.
B형간염 환자의 가족이나 동거인은 B형간염 표면항원(HBsAg)과 표면항체(anti-HBs) 검사를 통해 감염 여부와 면역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감염되지 않았으면서 항체가 없다면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다.
이미 만성 B형간염을 진단받았다면 과도한 음주를 피하고 검증되지 않은 건강기능식품이나 민간요법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특히 항바이러스제를 의사의 지시 없이 중단하면 바이러스가 급격히 재활성화돼 간염이 악화할 수 있어 꾸준한 복약과 정기적인 진료가 중요하다.
유정주 교수는 “B형간염은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하게 치료·관리하면 간경변과 간암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는 질환”이라며 “한 번도 B형간염 검사를 받지 않았다면 건강검진 등을 통해 감염 여부와 항체 보유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B형간염 환자도 정기적인 검사로 치료 필요 시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