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태 기자
이관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은 ‘북·미 대화 성사의 조건’을 이같이 진단했다.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된 현 단계에서는 당장 비핵화를 요구하기보다 ‘북한의 핵무기 증가를 어떻게 멈춰 세울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협상 의제는 이행 가능한 조치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능한 조치로 핵실험의 지속적 중단, 플루토늄·고농축우라늄 등 무기급 핵물질의 추가 생산 중단, 핵물질과 관련 기술의 해외 이전 금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핵운반수단의 추가 개발·시험 중단 요구 등을 예로 들었다. 그는 “북핵 중단을 통해 핵증강을 통제하고, 검증의 과정을 축적해 나갈 때 비로소 완전한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도 현실적인 정책 경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단’은 핵능력 증가를 멈춘다는 포괄적·정치적 표현이라면, ‘동결’은 핵물질 생산이나 핵시설 가동 등 추가적인 핵능력 증대를 구체적인 조치와 검증을 통해 제한한다는 협상 개념이다.
1981년 통일부에 입부해 노무현정부에서 통일부 차관을 지낸 이 소장은 2006년 18·19차, 2007년 제20차 남북장관급회담에 남측 대표로 참여하는 등 주요 남북협상에 직접 관여했다. 공직을 떠난 뒤에는 대표적인 북한·통일 연구기관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 연구 등 왕성한 학문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이 소장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올해 북·미 대화가 가능할까.
“제네바 합의나 싱가포르 합의처럼 완벽한 합의서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원론적인 수준의 합의는 가능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핵개발을 우선 중단할지, 미국은 어떤 조치를 취할지 등에 대한 큰 틀의 방향성 정도는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11월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주요 정상외교 일정이 있고, 북·미 정상 모두 대화의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충분하다. 계기는 정상 간 메시지 교환이나 비공개 접촉과 같은 상호 간의 조치로 만들어질 수 있다.
관건은 북·미 간 회담 의제에 따른 목표 수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다. 미국은 비핵화를 최종적인 목표로 유지하더라도 이를 대화의 선결조건으로 삼지 않고, 핵 개발의 추가 확대 억제에 따른 제재 완화를 비롯한 상응 조치 등 단계적 접근을 통해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우선해야 한다. 북한 역시 경제적 지원보다는 체제 안전과 대미 적대관계 해소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미 대화의 시작은 ‘선 비핵화’보다 관계 정상화 등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의지는 분명한 건가.
“(보유 핵무기 수 언급 등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듯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회담 재개를 위한 전략적 발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거나 기간을 줄이라는 이야기도 회담 성사에 대한 의지와 관심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몇 기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식의 발언 역시 사실상 핵보유를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줄 수 있지만 이 역시 전략적 차원에서 나온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이란이나 베네수엘라 등 여러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놓이면서 북핵 문제는 사실상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회담 추진 의지를 보이면서 다시 핵문제가 떠오른 측면이 있다. 그래서 지금 미국과 북한이 마주 앉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핵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우선 핵개발을 중단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단 멈춰 세운 뒤 하나씩 따져가며 주고받을 걸 주고받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이다.”
―우리 정부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은.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단순히 북·미가 만나도록 중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화가 열렸을 때 지속 가능하고 실질적인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속도와 방향을 조율하는 것이다. 우선 한·미 간 협상의 목표와 원칙, 의제를 구체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사전에 협상의 목표와 첫 단계에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최소한의 성과,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상응조치의 원칙, 양보의 기준 등을 명확히 정리해 공유해야 한다. 기존의 틀을 넘어선 냉철하고 창의적인 협상 설계와 함께 한국의 정책적 자율성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경계해야 할 것은 ‘대화의 성사’ 자체를 성과로 간주해 서두르는 것이다. 협상에서는 좋은 분위기나 정상 간 합의 자체보다 상대방이 실제로 무엇을 이행할 수 있는지, 합의가 지속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모든 조치는 상호성·단계성·이행 가능성을 기준으로 설계해야 한다.”
―‘코리아 패싱’ 우려는.
“북·미 간에는 관계 정상화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핵문제 역시 미국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형식적으로 ‘한국이 회담장에 있느냐 없느냐’보다 북·미 간 협상에서 한반도 전체의 안보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ICBM뿐 아니라 핵물질 생산, 핵탄두 증강, 전술핵과 다양한 운반수단을 포함한다. 그런데 북핵 문제를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과 한반도에 대한 위협으로 분리해 접근하면 한·미 간 안보 이해가 갈라지는 ‘디커플링’ 문제가 발생한다. 북·미 대화가 한국 안보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보면 북한이 핵을 동결하고 미국 등이 경수로를 제공하는 내용이 핵심이었지만, 합의문에는 남북대화를 추진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한·미 간 긴밀한 협의의 결과였다.”
―북한 ‘조선’ 호칭, 9·19 군사합의 복원 등이 대화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될까.
“현재의 북한 변화는 호칭이나 군사합의 하나만으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조선 호칭은 상호 존중의 상징적 조치로 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남북관계의 성격을 바꾸는 결정적 변수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남북은 이미 과거에도 필요에 따라 상호 정식 국호를 사용해 왔다. 대화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외교적 수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군사합의 복원은 평화공존의 조건을 만드는 현실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 접경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작은 충돌이 확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에 대응해 적대를 관리하고 공존을 제도화하는 새로운 남북관계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두 국가론’에 대응해 통일의 의미, 추진방식을 바꿔야 하나.
“통일이라는 헌법적 지향 자체는 그대로 두되, 통일에 이르는 방식과 당면한 정책목표는 변화된 현실에 맞게 재정립해야 한다. 통일정책의 중심을 ‘언제 통일할 것인가’에서 ‘어떤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미래의 통일이 가능해지는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난해 통일연구원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49.0%로 낮아진 반면,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는 응답은 63.2%로 과반이었다. 과거처럼 통일의 당위성만 반복해서는 국민적 동의를 얻기 어렵다.
당면한 우선과제는 상대 체제의 실체를 인정하고 군사적 충돌 없이 남북 간 대화와 교류가 지속될 수 있는 안정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평화공존’인데, 동·서독의 경험을 참고할 만하다. 서독은 동독이라는 국가적 실체와 공식 국호를 인정하면서도 동독을 완전한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동시에 ‘독일 민족 내부의 두 국가’라는 특수성을 유지하며 장기적인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공존의 제도화와 통일 가능성 유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관세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은…
●1952년 출생 ●1981년 통일부 입부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현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2005년 통일정책실장 ●2007년 남북회담본부장 ●2007년 제17대 통일부 차관 ●2018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