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크 와인 생산하던 ‘와인 불모지’ 스와틀랜드
에벤 사디, 고품질 와인 선보여 세계 무대 등장
‘와인메이커스 어워드’ 아프리카 대륙 최초 수상
한국 찾은 사디 “와인 품질 이미 포도밭서 결정”
밀과 양이 전부였던 땅, 값싼 벌크 와인이나 찍어내던 ‘와인 불모지’가 있었습니다. 그 땅을 세계가 주목하는 파인 와인 산지로 통째로 뒤바꿔놓은 인물이 나타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와인의 수준 자체를 한 단계 끌어올려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장본인, 에벤 사디(Eben Sadie)입니다. 그는 어떻게 남아공 와인의 혁명을 이끌었을까요. 최근 한국을 찾은 그를 따라, 남아공 와인 산지 스와틀랜드(Swartland)가 걸어온 와인 혁명의 역사와 진정한 남아공 파인 와인의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검은 불모지’ 스와틀랜드의 와인 혁명
남아공의 수도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으로 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스와틀랜드는 네덜란드어로 ‘검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166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얀 반 리베크(Jan van Riebeeck) 총독이 이곳을 찾았을 때 비가 내린 뒤였습니다. ‘코뿔소 덤불’이란 뜻의 자생 관목 리노스터보스(renosterbos)가 비에 젖어 대지를 온통 검게 물들인 모습을 보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 땅은 밀 농사와 양 축산이 전부였고, 와인은 지역에서 소비할 정도로만 소량 만들어졌습니다. 본격적인 포도 재배는 1948년, 생산자 열다섯 명이 모여 스와틀랜드 협동조합을 세우면서부터입니다. 그마저도 대형 증류주 회사나 대기업에 포도와 와인을 통째로 넘기는 벌크 와인 산지에 머물렀습니다. 1977년 지역 최초로 자체 병입 라인을 갖추며 품질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값싼 대량 생산지’라는 꼬리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스와틀랜드는 1990년대 후반 찰스 백(Charles Back)이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를 설립하며 가능성을 보았고, 1999년 에벤 사디(Eben Sadie)가 사디 패밀리 와인즈(Sadie Family Wines)를 설립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사디를 필두로 아디 바덴호스트(Adi Badenhorst), 크리스·안드레아 뮬리네(Chris & Andrea Mullineux) 부부 등 젊고 혁신적인 독립 양조가들이 모여 버려져 있던 고목을 발굴하고 테루아 중심의 최고급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2010년 생산자 연대이자 공식 단체인 ‘스와틀랜드 독립 생산자 협회(Swartland Independent Producers, SIP)’를 만들고 ‘스와틀랜드 혁명(The Swartland Revolution)’ 운동을 펼쳐 스와틀랜드를 역동적이고 독창적인 남아공 파인 와인의 중심지로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스와틀랜드 기후·토양·품종
남아공 와인 생산량의 90% 이상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교차하는 최남단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 주에 집중돼 있습니다. 남극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뱅겔라 해류(Benguela Current)’와 온도를 낮춰주는 강한 남동풍 ‘케이프 닥터(Cape Doctor)’는 무더운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서늘한 기후를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웨스턴 케이프는 기후와 테루아에 따라 5대 주요 지방으로 나뉩니다. 코스탈 리전(Coastal Region), 브리드 리버 밸리(Breede River Valley), 케이프 사우스 코스트(Cape South Coast), 클레인 카루(Klein Karoo), 올리판츠 리버(Olifants River) 입니다.
그중에서도 남아공 프리미엄 와인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곳이 ‘코스탈 리전’입니다. 남아공 전체 포도밭 면적의 약 45%를 차지하는 코스탈 리전은 9개 세부 산지로 구성되며 유명한 산지들이 바로 이곳에 대부분 몰려있습니다. 스텔렌보스(Stellenbosch), 케이프타운(Cape Town), 파를(Paarl), 스와틀랜드(Swartland), 프란슈호크 밸리(Franschhoek Valley), 달링(Darling), 웰링턴(Wellington), 툴바(Tulbagh), 루탄베르그 밸리(Lutzville Valley)입니다.
그중 스와틀랜드는 올드 바인과 내추럴 와인의 메카로 급부상한 곳으로 가뭄에 강한 슈냉 블랑과 시라 품종 와인이 독창적인 풍미를 자랑합니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입니다. 여름은 뜨겁고 건조해 한낮 기온이 크게 오르지만, 대서양에서 벵겔라 한류를 타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밤낮의 기온차를 크게 벌려놓아 포도의 산도를 지켜줍니다. 연간 강수량은 350mm 안팎에 불과할 만큼 적지만, 대부분의 프리미엄 포도밭이 인위적인 관개 없이 빗물에만 의존하는 드라이 파밍으로 관리됩니다.
토양의 뼈대는 지역 전체를 관통하는 말름즈버리 셰일(Malmesbury Shale)입니다. 점토질 암반으로, 와인에 단단한 구조감과 풍부한 질감을 심어줍니다. 스와틀랜드에는 부르고뉴 빌라주와 비슷한 세부 산지 와드(Ward)가 모두 8곳입니다. 그중 파르데베르그(Paardeberg) 산악지대를 중심으로는 화강암이 깔려 있어 포도나무 뿌리가 깊이 파고들며 선명한 미네랄과 높은 천연 산도를 끌어올립니다. 곳곳에 흩어진 편암과 사암, 철분 많은 토양은 복합미를 더합니다. 지지대 없이 낮게 자라는 올드 부시 바인이 유독 많은 것도 이 땅의 특징입니다. 척박한 토양과 가뭄 속에서 살아남으려 뿌리를 지하 깊숙이 뻗다 보니, 그만큼 토양의 미네랄을 흡수해 풍미가 응축됩니다.
품종의 얼굴도 뚜렷합니다. 화이트는 슈냉 블랑이 스와틀랜드를 넘어 남아공 전체를 대표하는 품종입니다. 특히 수십 년 묵은 고목에서 나온 슈냉 블랑은 다른 산지가 흉내 내기 힘든 깊이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여기에 그르나슈 블랑과 루산, 마르산, 비오니에, 클레레트 블랑슈, 팔로미노 등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레드는 시라가 이 땅의 성격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냅니다. 또 그르나슈, 무르베드르, 생소, 카리냥 같은 프랑스 론 품종에 남아공 토착품종 피노타지, 포르투갈 계열 틴타 바로카까지 폭넓게 재배됩니다. 그래서 스와틀랜드를 세계에 알린 건 단일 품종보다 블렌딩입니다. 시라를 중심으로 그르나슈와 무르베드르를 더해 묵직하면서도 허브와 향신료 뉘앙스가 겹겹이 쌓이는 남부 론 스타일 레드가 대표적입니다. 또 슈냉 블랑에 여러 지중해 품종을 섞어 화려한 아로마와 묵직한 바디를 완성하는 화이트도 스와틀랜드의 대표적인 스타일입니다.
양조는 철저하게 떼루아를 잘 살리는 데 집중합니다. 자연 효모만 사용하는 등 최소로 개입합니다. 새 오크통을 자제하고 중성 오크통과 콘크리트 에그, 암포라로 숙성하는 방식 역시 이 땅의 혁명가들이 만든 와인 문법입니다. 드라이 파밍과 부시 바인에서 나온 극소량의 포도는 기본적으로 짙고 응축된 과실 풍미를 품지만, 크게 벌어지는 밤낮의 기온차 덕분에 무겁거나 텁텁하지 않고 정교한 산도가 균형을 잡아줍니다. 짙은 농축미와 신선한 산도가 공존하는 이 독특한 스타일이야말로 스와틀랜드 프리미엄 와인을 다른 산지와 구분 짓는 대목입니다.
◆사디, 척박한 땅에서 가능성을 보다
밀밭으로만 여겨지던 이 척박한 스와틀랜드 땅에서 파인 와인이 나올 거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편견을 깬 인물이 바로 에벤 사디입니다. 1994년 엘센버그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부르고뉴, 미국 오리건과 캘리포니아, 스페인을 떠돌며 무려 서른 차례에 가까운 수확기를 현장에서 몸으로 익혔습니다. 1998년에는 스와틀랜드의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 와이너리에 수석 양조가로 초빙됐습니다. 원래 양조학과 생리학, 생물학을 공부한 과학도였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학적 사고 끝에 ‘와인은 과학이 아니라 문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당시 남아공 와인 산업은 여러 지역 포도를 대량으로 섞어 저가 벌크 와인을 찍어내는 방식이 주류였습니다. 저는 이 관행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단일 포도밭과 그 땅 고유의 개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방식을 남아공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스와틀랜드를 택한 이유도 단순합니다. 원산지 기준으로 남아공에서 가장 넓은 면적에, 가장 다양한 토양과 기후를 품고 있습니다. 또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올드 바인 포도밭이 유독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관리하는 포도밭은 마흔다섯 곳입니다. 이 포도밭을 전부 돌아보려면 하루에 약 400km를 운전해야 할 정도로 넓게 흩어져 있습니다.”
1999년 홀로서기를 시작해 사디 패밀리 와인즈를 설립한 에벤은 2000년 첫 플래그십 레드 와인인 콜루멜라(Columella)를 단 17배럴(약 5000병)만 생산합니다. 이 와인이 스와틀랜드를 세계 와인 지도에 선명하게 새겨 넣습니다. 당시 남아공 와인 산업은 여러 지역의 포도를 대량으로 블렌딩해 저가 벌크 와인을 대량 생산하는 체제가 주류였습니다. 에벤 사디는 이런 관행을 깨고 특정 싱글 빈야드 테루아의 고유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방식을 최초로 도입합니다.
2002년에는 시그니처 화이트 팔라디우스(Palladius)까지 탄생했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디 패밀리는 스와틀랜드를 넘어 남아공을 대표하는 라이징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특히 에벤 사디의 콜루멜라는 미국 유명 와인 매체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남아공 와인 역사상 최초로 95점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습니다.
에벤 사디는 2017년 ‘마스터 오브 와인 협회(Institute of Masters of Wine, IMW)’와 글로벌 주류 전문지 ‘더 드링크 비즈니스(The Drinks Business)’가 공동주관하는 ‘와인메이커스 와인메이커 어워드(Winemakers’ Winemaker Award)’를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수상하며 남아공 와인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립니다. 이 상은 2011년 스페인 도미니오 데 핑구스(Dominio de Pingus)의 피터 시섹(Peter Sisseck), 2012년 호주 펜폴즈(Penfolds)의 피터 가고(Peter Gago), 2014년 프랑스 도멘 르플레브(Domaine Leflaive)의 안 클로드 르플레브(Anne-Claude Leflaive), 2015년 독일 에곤 뮐러-샤르츠호프(Egon Müller-Scharzhof)의 에곤 뮐러(Egon Müller), 2016년 스페인 보데가스 알바로 팔라시오스(Bodegas Álvaro Palacios)의 알바로 팔라시오스(Álvaro Palacios)가 차례로 받아온 자리라, 그 무게가 남다릅니다. 최근에는 전 세계 프리미엄 와인을 대상으로 한 골든 바인즈 어워드(The Golden Vines Awards)에서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세계 최고의 라이징 스타’로 뽑혔고, 팀 앳킨(Tim Atkin MW)가 발간한 열두 차례의 남아공 스페셜 리포트에서도 두 차례나 최고의 와인메이커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와인메이커 역할은 최소 개입”
에벤 사디가 화이트 와인에서 영감을 받은 곳은 의외로 부르고뉴가 아니라 지중해입니다. 스페인 프리오랏(Priorat)이나 프랑스 남부 론의 샤토뇌프뒤파프(Châteauneuf-du-Pape)처럼 여러 품종이 뒤섞인 블렌드에 매료된 그는, 스와틀랜드에도 그런 빅 블렌드 화이트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금 사디가 키우는 포도 품종은 무려 38가지입니다. 수집벽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스와틀랜드라는 땅 자체가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는 스와틀랜드의 다양한 토질을 가장 정교하게 활용하는 생산자로 꼽힙니다. 화강암 토양에는 시라와 무르베드르를, 부식된 화강암에는 그르나슈와 틴타 바로카를, 편암과 점판암에는 생소를, 모래 토양에는 틴타 바로카와 슈냉 블랑을 각각 따로 심어 토양에 맞는 품종을 골라내고, 이를 다시 블렌딩해 풍미와 구조, 숙성 잠재력을 모두 갖춘 와인으로 완성합니다.
셀러에서는 최소한만 개입합니다. 그의 철학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와인의 품질은 양조장이 아니라 포도밭에서 이미 100% 결정됩니다. 와인메이커 역할은 그 결과물을 변형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지켜내는 데 있습니다. 포도 고유의 풍미와 떼루아를 가리지 않기 위해 새 오크통은 거의 쓰지 않고, 대신 중성적인 대형 나무통 푸드르와 콘크리트 탱크, 점토 암포라, 콘크리트 에그에서 와인을 재웁니다.”
그는 인공적인 산도 조절도 하지 않고, 정제와 여과, 저온 안정화 공정도 거치지 않습니다. 이산화황은 병입 직전에 최소한으로만 더할 뿐입니다. 상업용 효모는 일절 쓰지 않고 포도 껍질과 양조장에 깃든 토착 효모만으로 자연 발효시키며, 레드는 송이째 발효, 화이트는 송이째 압착이 원칙입니다. 수확 당일 밭에서 이미 엄선을 마친 포도는 양조장에 들어온 뒤 다시 골라내는 2차 선별조차 거치지 않습니다. 그해 포도밭이 받아 든 성적표를 가감 없이 그대로 병에 담겠다는 고집입니다.
품종 블렌딩 비율도 역시 자연에 맡깁니다. 콜루멜라와 팔라디우스에 쓰이는 포도밭은 열일곱 개인데, 처음 정한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품종 블렌딩 비율은 해마다 달라지는데 이것도 인위적으로 조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품종이 얼마나 잘 여무느냐에 따라 블렌딩 비율이 저절로 달라집니다. 사람이 아니라 그 해 포도가 스스로 블렌딩 비율을 정하는 셈입니다.
“블렌딩을 테이블 위에서 퍼센트를 맞추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와인을 섞겠다고 앉는 순간, 머릿속에는 유명 평론가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 사람은 뭐라고 할까, 저 사람 입맛엔 맞을까. 이런 신경을 쓰다 보니 결국 돈 문제까지 떠오르더군요. 블렌드를 더 정교하게 만들수록 오크통이든 포도든 더 사들여야 하니, 회계팀이 예산 걱정을 할 일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아예 개입을 최소화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다양한 포도재배 방식
에벤 사디는 포도나무를 기르는 방식도 남다릅니다. 보르도에 그랑 크뤼 등급이 매겨지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 방식대로, 어린 나무를 막대에 묶어 40년을 그대로 키운 뒤에야 지지대를 걷어냅니다. 그러면 나무 스스로 자기 수형을 완성해 한 그루 나무처럼 홀로 서게 됩니다. 최근 20년간 새로 심은 품종들은 대부분 건조에 강한 품종입니다. 낮 동안 스스로 기공을 닫아 수분 손실을 막는 이 품종들이 기후변화 시대의 답이라는 게 그의 판단입니다.
그가 가꾸는 포도밭은 전부 물 공급 없이 자라는 부시 바인(bush vine)입니다. 격자 지지대 없이 낮게 자라는 전통 방식 그대로 키워, 강한 햇빛과 바람으로부터 포도를 지키고 수확량도 자연스럽게 억제됩니다. 물을 전혀 주지 않다 보니 뿌리는 수분을 찾아 화강암과 편암, 사암 깊숙이 파고들고, 이 과정에서 와인은 강렬한 미네랄과 깊은 질감을 얻습니다. 사디는 196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심어진, 길게는 백 년에 가까운 고목 포도밭을 직접 발굴하고 임대해 관리하는데, 이 포도로 만드는 ‘올드 바인 시리즈’도 사디의 자부심입니다.
2014년부터는 화학 비료와 살충제를 완전히 배제한 유기농 재배로 전환해, 퇴비와 피복작물로 토양의 탄소 함량과 보수력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확량은 나무 한 그루당 평균 540g 안팎에 불과할 만큼 극소량입니다.
◆사디 패밀리 와인즈 대표 와인
사디 와인은 케이프 밸리 와인에서 수입합니다.
▶사디 팔라디우스(Palladius)
말린 복숭아와 풋사과, 은은한 시트러스에 라놀린과 마른 허브 향이 겹겹이 쌓입니다. 미네랄이 촘촘하게 깔리고 산도가 타이트하게 마무리를 이끌어, 숙성 후에도 산뜻함을 잃지 않는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입니다. 향신료를 넉넉히 쓴 해산물 파에야나 올리브유를 두른 지중해식 생선 요리, 숙성 치즈와 두루 잘 어울립니다.
최근 빈티지는 슈냉 블랑을 뼈대로 그르나슈 블랑, 클레레트 블랑슈, 비오니에, 베르데호, 루산, 마르산, 세미용 그리, 세미용 블랑, 팔로미노, 콜롱바르, 그릴로에 그리스 품종 아씨르티코(Assyrtiko)까지 더해 열세 가지 품종을 블렌딩합니다. 기후가 뜨거워지면서 아씨르티코가 최근 새로 합류했습니다. 덕분에 알코올 도수는 13%대 중반까지 낮아졌지만, 오히려 산도는 15년 전보다 더 살아 있습니다.
손으로 수확한 뒤 다시 손으로 골라낸 포도는 하룻밤 저온 안정화를 거치고 두세 시간에 걸쳐 천천히 송이째 압착합니다. 오크통은 아예 쓰지 않습니다. 725ℓ 콘크리트 에그와 400~1200ℓ 점토 암포라에서 품종별로 따로 저온 장기 발효를 거친 뒤, 12개월 동안 숙성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블렌딩에 들어갑니다. 블렌딩을 끝낸 와인은 대형 푸드르에서 다시 12개월을 더 재운 뒤, 정제와 여과 없이 그대로 병입해 바디감과 질감이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와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병속에서 계속 진화해 나갑니다.
▶사디 콜루멜라(Columella)
블랙베리와 바이올렛, 감초 향이 묵직하게 깔립니다. 벨벳처럼 매끈하면서도 타닌은 탄탄하게 조여주고, 카시스와 자두, 마른 허브와 축축한 흙 내음이 야생적인 매력을 더합니다. 숯불에 구운 양갈비나 사슴고기 스튜처럼 힘 있는 요리와 맞춰야 진가가 드러납니다.
2005년 빈티지는 포도밭 세 곳에서 나온 시라 80%와 무르베드르 20%로 만들었으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컬러와 산도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앞으로 15~20년은 거뜬히 더 버틸 것으로 평가됩니다. 지금은 시라, 무르베드르, 그르나슈, 카리냥, 생소, 틴타 바로카, 피노타지까지 일곱 가지 품종을 블렌딩합니다. 2023년 빈티지에서는 그르나슈 비중이 36%까지 올라왔는데, 처음 80%를 차지했던 시라가 자리를 그만큼 내준 셈입니다.
손으로 수확하고 다시 손으로 골라낸 포도는 3300ℓ 개방형 콘크리트 발효조에서 24도를 유지하며 송이째 3주간 자연 발효를 거칩니다. 발효가 끝난 뒤에도 3주간 더 침용한 다음 바스켓 프레스로 압착합니다. 결이 촘촘한 프렌치 오크통에서 새 오크 5%만 섞어 12개월을 효모 앙금과 함께 재운 뒤, 다시 옮겨 담아 효모 앙금과 함께 대형 푸드르에서 12개월을 더 숙성합니다. 오크통은 20년 주기로만 교체하며, 이 방식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식 숙성법과 닮아 있습니다. 젖산발효를 거치되 정제와 여과는 하지 않고 그대로 병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