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결제대행업체가 위장회사와 위조 서류를 동원해 국제 은행망으로 69억달러(약 9조5000억원) 이상의 자금을 이동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서방의 금융제재를 피해 러시아 기업의 해외 거래대금을 지급한 것으로, 군사 장비 구매 관련 거래도 포함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1일(현지시간) 러시아 핀테크 기업 ‘A7 네트워크’의 내부 파일 수십만건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2024년 말부터 2025년 8월까지 스탠다드차타드와 씨티그룹 등 국제 은행들을 통해 이 같은 규모의 자금이 이동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A7 네트워크는 러시아 기업의 해외 결제를 대신 처리하는 회사다. 몰도바 출신 사업가 일란 쇼르가 러시아 방위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영은행 프롬스뱌지방크(PSB)의 지원을 받아 2024년 말 설립했다. 러시아 기업이 외국에서 물건을 살 때 판매자에게 대금이 전달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러시아 은행들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이용이 제한되면서 이런 결제대행 수요가 커졌다. 스위프트는 은행들이 송금 지시를 주고받는 국제 통신망이다. 러시아 정부는 A7 네트워크를 수입대금 결제를 위한 대표적인 대안으로 내세웠다. 쇼르는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우리 시스템은 제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FT가 확인한 A7 네트워크의 주요 수법은 해외 위장회사와 가짜 거래 서류를 이용해 기존 은행망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아랍에미리트(UAE)와 홍콩, 키르기스스탄 등에 있는 법인 명의로 은행에 돈을 넣고, 이를 러시아 기업의 해외 거래대금을 지급하는 데 썼다. FT는 유출 자료에서 A7 네트워크 위장회사 100곳의 송금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 밖에도 최소 100곳이 문서에 언급돼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은행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실제 구매자와 물품, 배송 정보를 바꾼 서류도 만들었다. 기업 직인 수천개를 모아 사용했는데, 일부는 위조했고 일부는 해당 기업이 모르는 사이 실제 문서에서 가져왔다. 직원들에게는 제재 대상 물품의 세관 품목분류 코드를 제재 대상이 아닌 유사 품목의 코드로 바꾸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지난해 2월 러시아 고객을 대신해 야간투시 조준경 500개를 구매한 거래가 대표적이다. 대금은 360만위안(약 7억4000만원)이었지만, A7 네트워크 직원들은 강화유리를 사는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은행이 거래 내용을 묻자 품목을 신발로 바꾸는 방안까지 논의했다. 다만 이전 거래 서류와 맞지 않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강화유리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이동한 돈은 주요 국제 은행들을 거쳤다. 조사 대상 기간 홍콩 스탠다드차타드 계좌들이 A7 네트워크 연계 법인에서 받은 자금은 11억달러에 달했다. 홍콩 DBS에는 2억7300만달러가 송금됐고, 씨티그룹 고객들은 7400만달러를 받았다. 전체 자금 흐름의 절반을 조금 넘는 금액은 최종적으로 중국 은행 계좌에 들어갔다.
은행이 의심 거래를 차단하면 다른 경로로 송금을 늘렸다. A7 네트워크는 초기에는 키르기스스탄 은행들을 주로 이용했지만, 지난해 2월 스탠다드차타드가 일부 송금을 보류하고 관련 수취인 계좌를 폐쇄하자 UAE를 거치는 거래를 확대했다. UAE 최대 은행인 퍼스트아부다비은행(FAB)에는 17개 법인의 계좌를 개설했으며, 이들 법인을 통해 18억달러 이상이 송금됐다.
확인된 자금 전액이 군수품 구매에 쓰인 것은 아니다. A7 네트워크는 일반 민간기업의 해외 결제도 처리하고 있으며, 러시아 외환거래의 약 5분의 1을 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FT는 유출 자료에 금액을 확인할 수 없는 송금 1만7500건이 추가로 언급돼 있어 실제 자금 이동 규모는 더 클 수 있다고 전했다.
FAB는 FT가 지목한 A7 네트워크 연계 계좌를 이미 파악해 모두 폐쇄했다고 밝혔다. DBS는 A7 네트워크 자체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면서도 관련 법인 1곳의 계좌에 대해서는 내부 통제 절차에 따른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스탠다드차타드와 씨티그룹 등은 자금세탁 방지 관련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개별 사안에 대한 언급은 거부했다. A7 네트워크는 논평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앞서 A7 네트워크 관련 유출 자료를 분석해 오픈소스센터 보고서를 작성한 잭 트바로즈나(Zach Tvarozna) 전 미국 정부 은행 분석가는 “새로운 자료는 A7 네트워크 자금세탁망의 실제 규모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전통적인 은행 간 환거래 체계가 자금세탁에 악용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