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한국의 동료 예술인들과 하나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전통문화’라는 언어입니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 화려한 러시아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그젤 단원들이 ‘바리냐’, ‘카마린스카야’, ‘칼린카’ 등 러시아 민속무용을 선보였다. 이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낸 한국 전통무용극 ‘궁’이 같은 무대에 올랐다. ‘파토스(Pathos): 열정과 공감’을 주제로 이틀간 열린 ‘2026 한·러 문화예술제전’의 마지막 무대였다.
러시아 전통무용을 대표하는 모스크바 국립 아카데미 무용극장 ‘그젤(Gzhel)’을 이끌고 한국을 찾은 마리나 표도로브나 쿠클리나 단장은 이날 세계일보와 만나 “각자의 나라가 가진 전통문화를 알리고 그 문화유산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 예술인들의 공통된 사명”이라고 말했다.
쿠클리나 단장이 한국을 찾은 것은 2015년 이후 11년 만이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 한국 방문”이라며 “11년 전 한국에서 열린 문화축제에 참가해 여러 나라 예술단과 함께 공연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당시 젊은 단원들이 한국에서 열린 축제를 무척 즐겼던 기억이 난다”며 “다시 한국 무대에 설 기회를 얻어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한·러 문화예술계가 함께 마련했다. 러시아 문화부와 대한문화예술진흥협회, 한러대화(KRD)가 공동 주최했으며, 러시아 국립 공연기획기관 로스콘체르트와 주한 러시아대사관도 힘을 보탰다.
쿠클리나 단장은 이번 공연의 의미를 양국 간 문화교류에서 찾았다. 그는 방한에 앞서 “러시아와 한국의 문화교류는 양국 관계의 중요한 부분이자 국민 간 상호이해와 우호를 강화하는 강력한 수단”이라며 “우리는 통역이 필요 없는 언어, 춤이라는 언어로 서로 이야기한다”고 강조했다.
그젤은 이름부터 러시아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젤’은 모스크바 남동쪽 지역에서 수백년간 이어져 온 러시아의 대표적인 도자공예로, 흰 바탕에 코발트빛 청색으로 그려낸 문양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국민예술가이자 안무가인 블라디미르 자하로프는 1988년 그젤 공예 650주년을 계기로 극장을 창설했다. 이후 1993년 국립극장, 1999년 아카데미 지위를 얻었다.
그젤은 러시아 민속무용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클래식 발레 기법을 바탕으로 러시아 각 지역의 민속춤을 무대예술로 재구성하고, 그젤 도자기의 청백색 문양을 비롯해 팔레흐 세밀화와 조스토보 장식화, 파블로보포사드 숄 등 전통공예의 색채와 조형미를 의상과 무대미술에 녹여낸다. 민속무용과 발레, 음악, 공예가 어우러진 종합무대예술인 셈이다. 그젤이 스스로를 ‘모스크바의 문화적 명함’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문화프로그램을 비롯해 브릭스(BRICS)·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 관련 행사와 프랑스 칸 러시아예술축제 등에 참여하며 해외에서도 러시아 전통문화를 알려왔다.
쿠클리나 단장은 2013년부터 그젤을 이끌고 있다. 러시아 공연예술계에서 30년 넘게 활동하며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쳤고, 러시아연극예술아카데미(GITIS)에서 공연예술을 공부했다. 이후 모스크바 신드라마극장과 드라마·연출센터 등을 거쳤으며 러시아연방 ‘공훈 문화일꾼’ 칭호를 받았다.
쿠클리나 단장이 그젤을 이끌며 주력해온 것은 전통을 현대 관객과 연결하는 일이었다. 창립자 자하로프의 작품을 주요 레퍼토리로 이어가는 동시에 어린이 공연 ‘눈의 여왕’과 현대 안무 작품을 제작하고 영상·멀티미디어 기술도 적극 도입했다.
그는 “모든 무대 공연에는 하나의 역사가 담겨 있다”며 “여기에 영상과 같은 현대적인 시각기술을 더하면 그 이야기를 현대 관객에게 더욱 가깝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오늘날의 관객에게 이해받기를 원한다”며 “특정 세대에 머물지 않고 모든 세대가 우리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클리나 단장은 한국 전통무용에서도 러시아와 맞닿은 지점을 발견했다. 그는 “한국의 춤에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적 뿌리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며 “먼 과거에서 시작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춤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전통의 만남은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17일 그젤은 민속적 전통과 현대 안무를 결합한 ‘시간을 가로지르는 춤’을 선보였고, 18일에는 러시아 민속무용과 한국 전통무용극 ‘궁’이 한 무대에 올랐다. 행사 주제인 ‘파토스’에 대해 쿠클리나 단장은 “열정이 없는 예술은 존재하기 어렵다”며 “특히 무대예술은 열정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2022년 이후 한·러 정치·외교 관계가 경색되면서 양국 간 교류도 크게 위축됐다. 그럼에도 문화예술은 양국을 잇는 통로로 남아 있다. 러시아 문화부와 한국 문화예술계가 함께 행사를 마련하고 양국 예술인들이 서울에서 한 무대에 섰다는 점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쿠클리나 단장은 공연 성사에 힘쓴 양국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의 역할도 언급했다. 그는 “지노비예프 대사가 이번 공연이 성사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며 러시아 정부와 로스콘체르트에도 감사를 표했다. 이어 “한국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하고 싶다”며 “러시아의 예술을 한국 관객들에게 더욱 자주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