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개봉한 영화 ‘경주기행’의 감독 김미조는 올해 6월 첫 소설 ‘오프사이드’(안전가옥)를 발표했다. 부친상으로 15년 만에 교도소 밖으로 외출한 무기수와 그를 감시하는 신입 교도관이 각자의 목적을 안고 바닷가와 외딴섬을 오가는 추적극이다. 지난 7월 영화 ‘그림자 아이’를 선보인 감독 유은정은 첫 소설 ‘불행소원’(반타)을 같은 달 펴냈다.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소원이 이뤄진다는 설정 아래 아티스틱 스위밍 선수인 여고생들의 욕망과 질투, 불안을 그린 호러물이다.
영화감독이 소설을 쓰는 일 자체는 새롭지 않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손원평은 소설 ‘아몬드’(2017)로 세계적 독자층을 확보한 뒤 첫 장편영화 ‘침입자’(2020)를 연출했다. 영화 ‘헬로우 고스트’(2010)를 연출한 김영탁은 소설 ‘곰탕’(2018)으로 10만부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최근에는 영화감독 출신 정대건이 소설 ‘급류’(2022)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영화감독·소설가 김진영은 김태희 주연 동명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마당이 있는 집’(2018)을 시작으로 ‘괴물, 용혜’(2025), ‘나의 낯선 동행자’(2026) 등 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장르소설 작가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영화감독이 소설을 쓰면 ‘전향’이나 ‘외도’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에는 한 창작자가 영화와 소설을 동시에 발표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코로나19 이후 IP(지식재산권)를 중심으로 콘텐츠 산업의 경계가 옅어지면서 창작자들 역시 특정 매체보다 이야기 자체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한국영화 투자 위축과 최소 수년이 걸리는 제작 과정의 불확실성 역시 영화인들이 소설로 눈을 돌리는 배경이다. 김미조의 ‘경주기행’은 2021년 시나리오 초고 집필 후 올해에야 개봉했다. 그는 지난달 인터뷰에서 “‘경주기행’의 투자 과정이 지지부진하자 답답함에 소설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은정은 “시나리오 백 편을 써도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미완성에 머물지만, 소설은 한 편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현상을 단순히 영화 산업 침체의 결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유 작가는 “‘불행소원’은 당초 ‘여고괴담’ 시리즈의 신작 영화로 구상했으나 등장인물이 많고 이야기가 커 결과적으로는 소설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판타지·호러 장르를 꾸준히 다뤄온 그에게 소설은 제작비와 영상 구현 가능성을 고민하지 않고 상상력을 밀어붙일 수 있는 자유로운 영역이기도 했다.
한예리·이희준 주연 영화 ‘환상 속의 그대’(2013)를 연출한 강진아는 2020년 ‘오늘의 엄마’를 시작으로 올해 7월 펴낸 ‘호아’까지 꾸준히 소설을 발표해 왔다. 강 작가는 “상업영화 감독으로 이른바 ‘팔릴 만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구상했지만, 팔릴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걸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며 “그 이야기는 영화로는 풀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고, 소설 형태로 다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영화과 졸업 후 연출부를 거쳐 장편 독립영화 ‘미혹’(2022)을 연출한 김진영 작가는 현재 자신의 소설 ‘괴물, 용혜’를 원작으로 한 장편 상업영화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다. 김 작가가 직접 연출을 맡을 예정이며, 작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에 초청됐다.
매체가 영상에서 글로 달라져도 영화 현장에서 익힌 감각은 소설 창작에도 이어진다. 강 작가는 “소설을 퇴고할 때 영화 스태프와 배우들의 시선을 떠올린다”며 “촬영감독이라면 이 장면 앵글을 어떻게 잡을까, 배우라면 이 대사를 어떻게 말할까를 상상하며 원고를 고친다”고 설명했다. 김 작가는 “영화 시나리오를 신(Scene) 단위로 설계하듯 소설도 먼저 구조를 짜고 살을 덧붙이며 쓴다”고 말했다. 영화가 남긴 습관은 매체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셈이다.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확대되면서 장르 창작 기법에 친숙한 영화인들을 소설로 영입하려는 출판사들의 시도도 활발하다. 김 작가는 “출판계에서 새로운 장르 작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영화 창작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분위기를 자주 느낀다”고 설명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안전가옥은 김진영·김미조·김혜영 등 영화로 출발한 창작자들과 협업해 소설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반타 등 레이블을 보유한 콘텐츠 기업 오팬하우스는 출판과 영상화를 아우르는 IP 비즈니스를 전개하며 소설을 출간하고 있다. 이제 창작자들은 하나의 매체에 머물지 않는다. 이야기가 먼저이고, 형식은 그다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