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조건이 중요하지 않은 스포츠가 없겠지만, 촌각을 다투는 수영에서는 승부를 가르는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신장 1㎝, 팔의 리치 1㎝에 따라 메달 색깔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23개를 쓸어담은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도 193㎝의 큰 신장을 자랑했고, 자유형에서만큼은 펠프스도 명함을 내밀지 못했던 ‘인간 어뢰’ 이언 소프(호주)의 신장도 196㎝였다.
반면 한국 수영에는 신체 조건을 앞세운 세계적인 선수가 드물었다. 당장 불모지였던 한국 수영에 희망을 꽃피운 ‘마린 보이’ 박태환의 신장도 184㎝였지만, 항상 신체 조건의 불리함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한국 수영의 간판이자 ‘황금세대’를 이끄는 쌍두마차인 황선우와 김우민도 신장이 각각 187㎝와 182㎝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국 수영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은 주로 중장거리 종목에서 배출됐다.
이런 한국 수영에 ‘피지컬 괴물’이 등장했다. 신장은 195㎝, 양팔을 벌렸을 때 한쪽 손끝에서 반대쪽 손끝까지의 거리를 일컫는 윙스팬은 무려 216㎝에 달한다. 압도적인 신체 조건을 앞세워 한국 자유형 단거리의 ‘샛별’로 떠오른 김영범(20·강원특별자치도청)이 그 주인공이다.
김영범은 지난 21일 일본 도쿄 아쿠아틱스센터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50m 결선에서 대회 신기록인 21초66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육상으로 따지면 100m에 해당하는 자유형 50m는 신체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0.001초의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종목 특성상 1㎝라도 길어야 터치패드를 빨리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수영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신체 조건으로 일찌감치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김영범은 이번 아시안게임을 통해 아시아 무대를 평정해냈다. 잠재력만 있던 유망주가 금메달이라는 결과를 이뤄냈으니 앞으로의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은메달을 따낸 자유형 100m에서도 김영범의 기량이 세계적 수준임을 입증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46초40으로 세계신기록을 작성한 이 종목 최강자인 판잔러(중국)에 불과 0.04초 뒤진 47초65초를 기록했다.
김영범의 장점은 뛰어난 신체 조건뿐만이 아니다. 큰 무대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과 집요한 승부욕도 있다. 자유형 50m 제패는 전날 치른 자유형 100m에서의 석패 덕분이라고 할 정도다. 그는 “어제 그렇게 아쉽게 은메달을 따지 않았다면 오늘의 금메달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며 “오늘 아침까지도 어제 터치 장면을 100번 넘게 돌려봤다. ‘여기서 이렇게 손을 뻗었으면 어땠을까’ 자책도 많이 했지만, 결국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번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을 통해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한 김영범은 2년 뒤 열리는 2028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향한 기대감도 키우고 있다. 한국 자유형 단거리 ‘샛별’에서 명실상부 ‘에이스’로 등극한 김영범은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조금 더 듣기 좋은 것 같다. 에이스로 불릴 수 있도록 더 악착같이 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영범은 22일 이주호(서귀포시청·배영)·최동열(강원특별자치도청·평영)·양재훈(강원특별자치도청·접영)과 함께 출전해 남자 혼계영 400m 결승에 출전해 3분31초97을 합작해 중국(3분27초89), 일본(3분28초70)에 이어 3위로 경기를 마치며 동메달을 따냈다. 자유형 100m, 계영 800m, 자유형 50m에 이은 이번 대회 네 번째 메달이다. 한국은 2022 항저우에 이어 이번에도 혼계영 400m에서 시상대에 올랐다.
자유형 장거리 간판인 김우민은 1500m 결승에서 15분16초52로 출전 선수 8명 중 최하위인 8위에 머물렀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왼쪽 어깨 회전근개와 관절와순이 부분 파열된 김우민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물살을 갈랐지만, 500m 구간 이후 심각한 통증을 느끼며 2022 항저우 은메달의 기세를 잇지 못했다. 경기 뒤 취재진 앞에서 눈물을 쏟은 김우민은 “어제 계영 800m를 치르고 나서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해 오늘도 힘을 내보려 했지만, 레이스 도중 통증이 올라왔고,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전혀 따라주지 않으니 너무 억울하고 막막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